[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노을이 지고 있다. 선홍빛으로 물들인 하늘빛이 오늘따라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햇살도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데 하물며 사람이랴. 하루 동안 세상에 빛을 밝힌 햇살의 위용은 마지막까지 생명으로의 도리를 다하듯 장엄한 노을빛을 보이다 한 순간에 사라져 간다. 꽉 채운 하루가 덧없이 사라져 가는 아쉬움이랄까, 설명 없이도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압도 된다.

내가 정진권 선생님을 만난 건 문학이 아닌 탁구장에서였다. 취미삼아 탁구를 즐긴 게 선생님을 만나게 된 동기였다. 그때 나는 등단십년차인 애송이 수필가였고 선생님은 한국수필문단의 거목으로 우러러 보아야 할 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탁구장에서 만나 운동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막상 그날이 오면 그분을 대해야 하는 부담감은 내 마음의 갈등을 부추이었다. 갈까 말까 하는 망설임과는 상관없이 나는 매번 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탁구는 상대성 운동으로 일대일 매치거나 복식경기를 해도 네 명은 필수 인원이었다. 가끔, 아니 거의 매주 한국수필문단의 원로 선생님 두어 분을 동행하시곤 했다.

운동이 끝나면 함께 식사자리로 이동을 했다. 식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반주는 격의 없는 자리가 되었다. 우정을 과시하듯 오가는 말씀에도 죽이 척척 맞았다. 일상의 무미건조한 삶을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하고 그리운 정담으로 이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5년여쯤 주일에 한 번씩 만났지만 대화에서도 과시나 허세나 거드름을 전혀 보지 못했고, 주정(酒精)에서도 무리함이나 더함이나 덜함이 없었다. 격정에 얼룩진 스펙터클 이야기보다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매번 주를 이루었다. 수필계의 어른들에게서 듣는 평범한 이야기는 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소리였고, 내 가슴에 잠든 감성의 소리였고, 내 스스로 성찰하고 닦아야 할 마음의 소리였다.

정진권 선생님은 당신의 목소리가 쉬고 갈라진 것에 대해 처음만난 이에게는 대화에 앞서 양해를 구하시듯 미안함을 표하시곤 했다. 노파심을 우려해 세상을 향한 쓴 소리를 하거나, 햇살 담긴 우정 어린 담소를 나눌 때도 당신이 갖고 있는 소신을 굳히기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쪽으로 기울어 말씀하셨다. 가끔 한바탕 폭소가 터질 때면 혼자 행복을 다 거머쥔 것처럼 얼굴 가득 미소가 흘렀고 작금의 수필 계를 걱정하는 말이 오갈 때면 한국문단의 걱정을 혼자서 다 짊어진 것처럼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수필을 사랑했었다.

정진권 선생님은 1935년 충북영동 출신으로 문학의 장르를 뛰어 넘는 많은 저서를 출간한 대가이다. 수필집에서부터 선집, 논저, 역서, 소설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문학 속에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과의 아름다운 인연 줄이 있었기에 나 또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원로 분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수필가로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열고 저장해놓은 연락처를 점검한다. 전화번호가 수없이 내장되어 있다. 정진권이란 이름을 지우고 나니 정신적 지주를 잃은 듯 마음이 허전하고 서럽다. 가까이 지내던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나는 내 몸 어딘가가 뻥 뚫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찬바람이 쉭쉭 온몸을 타고 넘나드는 허전함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고 나면 잘못 산 것이 후회도 되고 잘 살아야 한다는 반성도 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소멸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 마땅한 진리를 받아들이기에 나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매일이 바쁘고 정신없다고 아우성이다. 세상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수필가 박원명화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