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노천 기자] 빨랫줄에 매달린 옷가지와 수건의 새 떼//안으로 가져오면 파닥거리는 냄새의 깃털들//팔다리와 얼굴에 진탕 길 <시 ‘햇빛 냄새’ 일부>

그나마 1, 2연은 이미지를 따라가는 듯 하지만 벌써 3줄째 내려오면 전통적인 시법은 무너지고 진탕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때부터 독자들의 발길이 서성거려진다. 서술도, 서사도, 묘사도, 의미도, 이미지도 아닌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서버리고 만듯하다.

어느 평자의 말을 빌리자면 ‘현상에서 촉발된 시인의 내적 정동의 세계를 그리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적 작시술과 결별하고 반리얼리즘의 작시술로 향해서 의미화되지 않는 이미지의 충돌과 기표의 물질적 효과에 주목하면서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로서의 미학적 현대성을 추구한 셈이다.’는 평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정란 시인은 2017년 ‘이를테면 빗방울’ 이후 6년 만의 다섯 번째 시집 ‘나는 있다’를 도서출판 여우난골에서 펴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인 ’어둠. 흑백주가 있는 카페‘와 ’나무의 기억력‘은 전통적인 시적 문법에 의지해서 외부의 사물과 풍경이 촉발하는 정동과 인식의 변화를 그렸다고 한다면 세 번째 시집인 ’눈사람 라라‘에서부터 어느 평론가의 명명대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와 같은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의미의 세계에서 일탈해 콜라주와 몽타주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의 날카로운 충돌과 카오스의 질서를 향한 바 있다.

현상에서 촉발된 시인의 내적 정동의 세계를 그리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적 작시술과 결별하고 반리얼리즘의 작시술로 향해서 의미화되지 않는 이미지의 충돌과 기표의 물질적 효과에 주목한다’고 황치복 평론가는 이정란의 시풍을 다소 난해하게 평했다.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교란하는 리비도까지는 끌고 가지는 않겠다.

‘있다 없다 사이 오솔길을 오래 걸었다. 새로운 있다는 없다 앞에서 얼굴이 붉어진다.

어디서부터 동행했는지 바람과 함께 온 투명한 저녁에 몸이 용해되었다‘ 시인의 말에서 지금 세상의 모든 의미들을 무작위로 끌어들여 시인의 심연 속으로 용해 해버리고 새로운 시법으로 판을 짜고 있는 것 같다.

’소리의 바탕은 고요‘이듯이 ’세상의 있는 것은 없다‘란 바탕에서 연속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의 유기체이다. 한때 있던 것을 없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지금은 없어졌으니 있는 것도 아닌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공(空)이라 표현 하고 있다.

어차피 일상 언어와 다른 세상에서 시인으로 살바에야, 온 생을 시적으로 투자했다면 일상과는 다른 언어를 통한 언어적 유희와 시도를 마음껏 해보는 이정란 시인의 시법에 나는 자극을 받는다. 일상의 지시적 언어에만 머물러 있는 시작보다야 더 가치 있는 실험적인 작업이라 여기면서 이정란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