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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싫어한 지도자] 엉덩방아 찧고 골프 끊은 김영삼 ‘골프 암흑기’

골프를 금지시키면 일반 국민은 무조건 좋아한다 ‘골프 안치겠다 폭탄선언’ 안문석 작가l승인2016.05.06l수정2016.05.0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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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과 김종필의 골프 회동, 3당 합당을 위해 골프를 즐겼다. 실제 당시 김영삼의 실력은 110타 정도였다고 하니 골프에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이 만들어놓은 청와대 연습장 없앴고, 청남대 골프장도 방치, 골프 사치성 스포츠로 분류 높은 세금 부과...

[골프타임즈=안문석 작가] 김영삼도 원래는 골프를 했다. 골프의 단점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10월 유신 이후 골프를 끊었다. 야당 국회의원이 암혹한 시국에 골프를 하는 것은 비난의 여지가 많았다. 그러다가 다시 골프를 시작한 김영삼은 1989년 김종필과 잇따른 골프 회동을 통해 3당 합당에 합의했다. 3당 합당에는 합의했지만 이후로 골프는 다시 끊었다. 계기는 김종필과의 네 번째 골프 회동이다.

1989년 10월 2일 안양CC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이 만났다. 3당 합당을 위한 몇 차례의 회동 가운데 하나였다. 양측의 책사 황병태, 김용환 의원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은 골프를 하면서 좀 가벼운 마음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김영삼은 하얀 긴팔 셔츠에 갈색 조끼까지 멋지게 받쳐 입고 1번 티박스로 향했다. 몇 번 연습 스윙을 하고는 공을 티에 올렸다. 연습은 제대로 못했지만 자신은 있는 표정이었다. 공을 향해 크게 스윙을 했다. 하지만 클럽과 공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너무 세게 휘둘렀는지 김영삼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렸다.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 얼굴을 찡그릴 수도 없었다. 환한 표정을 지었다.

김종필은 뒤에서 놀란 듯, 당황한 듯, 재미있는 듯 드라이버를 든 채 웃었다. 현장에선 환한 표정이었지만 분명 김영삼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골프는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코스에 들어서는 순간 경쟁심도 생긴다. 지난번보다 잘 쳐야 하고, 버디 몇 개는 해야 하고, 특히 동반자보다는 잘 쳐야 한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정치적 라이벌 김종필 앞에서, 그것도 뭇 신문·방송이 보는 가운데 티샷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어버렸으니 기분이 나빠도 많이 나빴을 것이다.

필자도 드라이버샷을 연이어 세 번 헛스윙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샷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은 못 봤다. 김영삼은 골프에 영 소질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제로 당시 김영삼의 실력은 110타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김영삼은 골프를 아예 끊어버렸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이 만들어놓은 청와대의 연습장을 없앴고, 청남대 골프장도 방치했다. 골프를 사치성 스포츠로 분류해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연습장을 없애는 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있다.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인 만큼 세제를 조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갔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재임 기간 중 골프를 안치겠다”고 선언했다. 취임 한 달이 안 된 1993년 3월 17일 금융단체회장단과의 조찬간담회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땀과 노력이 필요한 즉 나는 그런 뜻에서 임기 중 결코 골프장에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여기까지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은 여기에 덧붙여서 “골프는 재미있지만 국민에게 위화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빼앗습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김영삼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도 골프를 했다. 유신 이전에도 했고, 3당 합당 논의 당시에도 했다. 티샷하다 넘어진 다음에는 안 했다. 한마디로 골프로 별 재미를 못 봤다. 해봐야 잘 안 되고 그러다보니 크게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김영삼은 여당의 당대표일 때도 안 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 ‘안 한다’고 선언해도 자신은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위화감, 일 등을 갖다 붙였다.

김영삼이 그렇게 ‘안친다’고 선언함으로써 공직자들의 발도 묶였다. 뿐만 아니라 기업하는 사람들도 못 치게 했다. 경제관련 연구기관 대표들과 조찬을 하면서 “부도나는 회사는 사장이 출근하자마자 골프 치러 가는 회사입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경제부총리 이경식은 국세청장에게 그런 사람들을 조사하라고 했다. 사장이 골프를 치면 망한다는 생각이었고, 골프 치는 사장들은 찍어서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발상이었으니 저급하기 이를 데 없다. 김영삼은 골프에 대한 자신의 좋지 않은 기억과 인식을 그런 식의 비합리적인 발언과 조치로 표현했다.

어쨌든 김영삼의 발언으로 골프는 ‘금기 스포츠’가 되었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당시에도 클린턴은 골프를 하고 싶어 했지만, 김영삼이 조깅을 하겠다고 해서 새벽 조깅으로 대체되었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국회의원들 골프를 좀 하게 하시지요”하고 건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1995년 8월에는 강원경찰청장 정동수가 평일에 육사 선배인 전두환과 골프를 했다가 좌천되기도 했다. 평일에 김영삼이 싫어하는 골프를, 김영삼이 싫어하는 사람과 했으니 그야말로 제대로 걸린 것이다.

김영삼은 임기 말까지 금지령을 꼭 붙들고 있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1997년 8월 보건복지부 차관 전계휴는 휴일에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해원과 골프를 쳤다가 들통 나 차관이 된 지 5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차남 김현철이 구속되어 심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김영삼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골프금지령을 어겨 김영삼을 대로(大怒)하게 했고, 그 결과 조기 낙마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삼이 그토록 골프를 금지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깨끗한 문민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 때문이었다. 직전의 노태우, 그 이전의 전두환이 기업에서 돈을 받고 부정축재를 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 이미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려 한 것이다.

공직자, 기업인까지 골프를 못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분명 문제가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일반 국민의 정서는 ‘골프는 사치’라는 것이었다. 정치를 오래한 김영삼은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했고,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합리, 비합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골프를 금지시키면 일반 국민은 무조건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칼국수 점심’도 골프 금지와 똑같은 ‘청렴 이미지 창출 전략’이었다. 청와대로 사람을 초청해도 칼국수 한 그릇 대접하는 데 그쳤다. 김대중이 야당 총재 시절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을 한 적이 있다. 김영삼은 그날도 점심으로 칼국수 한 그릇만 내놨다. 회담을 마친 김대중은 당사로 돌아왔다.

양김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기 위해 기자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당사에 오자마자 기자실로 가지 않았다. 먼저 그가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허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밥을 한 그릇 먹고 그제야 기자회견장으로 갔다. 여하튼 김영삼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는 데 진력했고, 그런 맥락에서 골프를 안 치고, 골프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골프업계는 죽을 맛이었다. 골프장도 안 되고, 골프 용품점과 골프장 주변의 음식점도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을 골프계에서는 ‘골프의 암흑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골프금지령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골프를 좋아하는 공직자들은 몰래 골프를 쳤다. 필명(필드용 가명)을 쓰고 얼굴을 가려가면서 골프를 쳤다. 새벽 골프를 하기도 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를 바꿔 타고 가는 ‘007 골프’도 했다. 감찰기관들이 휴게소에 장시간 주차되어 있는 차를 조사하기도 했다. 공무원끼리는 “1998년 3월 1일에 보자”는 말을 하곤 했다. 김영삼의 임기 후 처음 맞는 3·1절에 골프를 하자는 말이었다.

골프금지령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그때도 잘 안 지켜졌다. 1971년 초 당시 백두진 총리가 공직자 골프금지령을 내렸다. 뒷거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골프금지령이 내려지는 순간 잘 지켜질지 의구심이 많았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1971년 3월 1일자)를 보자.

“하기야 요즘의 골프열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비가 남침해 한창 소탕전을 벌이고 있을 때 작전 지구에서 골프를 즐기다 좌천된 공무원이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게 40여 년 전 상황인지, 현재의 상황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경향신문』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정치인들은 골프를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어느 틈엔가 사랑방정치, 요정정치는 골프정치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골프금지령의 실효가 얼마나 갈는지 궁금하다.”

1971년 상황이 벌써 이랬고, 김영삼이 재임하던 1990년대에는 골프정치 현상이 훨씬 더 심해져 있었다.

『경향신문』 기사가 말하는 것처럼 1970년대 초만 해도 골프정치가 많이 성행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요정정치의 시대였다. 대표적인 요정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던 ‘청운각’이었다. 주인은 ‘아마이’라고 불리던 40대 여인이었는데, 수완이 뛰어나 정객, 사업가, 군 장성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이는 안주인을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로, 이 여인의 본명은 조수임이었다. 조수임은 젊고 예쁜 여성들을 많이 고용해 손님을 끌었고, 이 여성들을 잘 다뤄 요정의 손님을 계속 늘렸다. 정부의 장차관, 웬만한 회사의 사장들이 여기서 만나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비밀스런 거래를 했다. 주변의 집을 여러 채 사들여 데리고 있는 여성들의 기숙사로 쓸 정도로 청운각은 날로 번창했다.

▲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이 만들어놓은 청와대 연습장을 없앴고, 청남대 골프장도 방치했다. 골프를 사치성 스포츠로 분류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다가 유력 인사들이 골프를 많이 하게 되면서 청운각보다는 서울CC, 안양CC 등에서 사람을 만나고 긴한 대화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조수임도 이런 흐름을 금세 알았다. 그 자신도 서울CC에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세상의 조류를 알아야 했고, 골프를 알아야 손님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원가입이 순탄치 않았다. 접객업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서울CC 회원이 될 수 있느냐며, 가족 회원으로 되어 있는 여성들이 반발했다. 서울CC의 초대 이사장 이순용이 이들을 설득해서 조수임을 가입시켰다. 물론 요정정치가 쉽게 사라지진 않았지만 요정에서 골프장으로 정치적 만남의 중심이 서서히 옮겨갔고, 1970년대 초부터 정치, 사업과 골프의 연결고리는 아주 탄탄해졌다.

시 한 편 읽어보자. 김지하의 대표작 「오적(五賊)」이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오적이 모여 신나게 골프를 하는 대목이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이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 듯, 구름은 둥실
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秘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

이 시가 나온 게 1970년이다. 골프로 얽히는 고관들의 비밀스런 관계가 시인 김지하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골프금지령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옛날이야기를 좀 해보자. 골프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미 550여 년 전에 골프금지령이 있었다. 1457년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2세가 골프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궁술처럼 전쟁에 도움이 되는 스포츠를 해야 하는데, 골프는 그런 걸 못하게 남자들을 유혹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때도 금지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남자들은 전과 같이 골프를 한 것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골프가 점점 확산되었고, 이후 미국까지 전파되었다.

이런 골프금지령의 속성은 국가에 대한 경제제재와 비슷하다. 경제제재의 역사도 깊다. 세계 역사에서 잘 알려진 것이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다. 나폴레옹은 영국 점령에 실패하자 대륙의 국가들이 영국과 거래하는 것을 금했다. 이렇게 되자 제일 힘든 국가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공업이 발달하지 못해,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값싼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영국에서 신발이나 옷 등을 수입해야 했다. 영국에 밀을 수출하기도 했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안 듣고 영국과 거래를 했다.

나폴레옹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1812년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결과는 대패였다. 겨우 패잔병 5,000명의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걸로 나폴레옹은 몰락했다. 그뿐인가? 1959년 쿠바혁명 성공 이후 쿠바에 대한 미국의 장기간의 경제제재, 후세인 대통령 당시 이라크에 대한 유엔과 미국의 경제제재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 대해 시행하고 있는 유엔과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해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시큰둥하다.

경제제재는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 추구 욕망을 억누르려 하는 매우 어색한 강제 수단이다. 특히 국제사회는 기본적인 성격이 무정부상태인데, 여기에 그러한 강제 수단을 적용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다. 골프금지령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인 오락 욕구를 강제로 누르는 것이어서 역시 실효성이 보장되기 어렵다. 그렇게 지켜지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골프금지령을 김영삼은 20세기 말 1990년대에 내렸다.

이명박 정부도 금지령 속에 있었다.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류우익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 시점에 골프를 하는 수석이나 비서관은 없겠지만……”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것이 금지령이 되었다. 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 상황 악화,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이 금지령은 풀리지 못했다.

박근혜는 골프를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골프를 아주 좋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골프 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임기 초반인 2013년 3월 북한이 정전협정 무효화를 선언하면서 긴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부 장군들이 골프를 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가 국무회의에서 “안보가 위중한 시기에 현역 군인들이 주말에 골프를 치고 그런 일이 있었다. 특별히 주의를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것이 금지령처럼 되었다.

2013년 7월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의 대화에서도 “골프를 치라 말라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바쁘셔서 그럴 시간이 있겠어요?”라고 했다. 공직자 골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이후 세월호 침몰 사건과 메르스 확산 사태 등으로 공직사회에서 골프를 하면 안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2015년 2월 박근혜가 나서서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고 말했지만, 사회적 분위기와 경기 침체가 겹쳐서 ‘공직자는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2015년 10월 세계적인 골프 이벤트인 프레지던츠컵 명예대회장을 맡았고, 미국프로골프협회 관계자들에게 산업적 측면의 골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임기 후반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안문석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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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통령과 골프에서 발췌, 저자 안문석 / 도서출판 인물과사상사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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