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시인 [풀] 전문, 창작과 비평(1968년)-

[생각 하나]
풀은 힘도 없고 여리고 바람에도 상처받기 쉽다. 그렇지만 풀은 힘에 의해서도 쓰러지지 않고 죽지 않고 버림받지 않는 하잘 것 없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김수영이 죽기 전 마지막 남긴 시가 풀이다. 시인의 시가 풀에 축약되어 있고 비유를 통한 풀은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절 시인의 참여가 직설화법이 아닌 묘사(서정적)의 진수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시는 일상적인 풀과 바람의 대립 구도지만 주체는 풀이다. 눕고 울고 누웠다 일어난다 웃는다 풀이 그랬다. 풀은 생명력, 많음(사유, 思惟)이 내포(內包)된 끈질김이 민중으로 시대를 대변했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에 농락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을 견뎌낸 생명력이다. 생명력은 강인한 자신감이다. 삶을 충실히 살아온 자유다.

김수영의 시는 자유다.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
바람 불어 걸어가는 날 무심히 풀을 본다. 김수영 시인의 언어가 그리움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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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문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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