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와인이 미국 내에서 품질에 대한 인정을 두루 받기도 전에 해외에서 사고를 쳤다. 파리의 심판은 오히려 캘리포니아, 특히 나파 밸리 와이너리들에게 상업적 성공의 초석이 됐다.

[골프타임즈=신성호 와인칼럼리스트] 1848년의 골드 러쉬를 시작으로 19세기 중반과 후반에 미국이 부와 문화적 다양성을 축적하고 있는 동안에 와인의 본고장인 유럽의 포도밭들은 필록세라라는 전대미문의 악성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외조 덕분에 19세기 후반 미국 와인계는 제1대 부흥기를 비교적 손쉽게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콤한 순간도 잠시, 미국에서는 금주령(1919년~1933년)이 내려지고 빠르게 성장하는 와인산업은 필록세라 못지않게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금주령이 끝나고 1960년대에 진지한 품질혁명의 서막이 오르기 전까지 약 30년 동안에는 버려진 포도밭과 양조장이 재건되어 와인산업에 다시 생명의 숨결이 불어왔으나 생산되던 와인의 주종은 포트 와인과 유사한 스위트 와인들이 주를 이루었고, 오늘날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카버네 소비뇽과 샤도네이의 재배면적 또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미국 와인생산자들은 이 시기를 종종 '잃어버린 30년'으로 표현하곤 한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 와인의 제2대 중흥기의 물고를 튼 사건은 미국이 아닌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날아들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The Times지가 이것을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란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세계 와인계를 강타하게 되는데 이번 칼럼에서는 파리 테이스팅의 역사적 의미와 미국 와인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부문 모두에 있어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의 기라성 같은 와인들을 모두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는 누구도 예상 못했던 결과가 가져온 충격파가 워낙 컸던 탓에 파리 테이스팅은 기획의도와 배경이 자주 생략된 채 결과와 영향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1976년 파리의 테이스팅의 기획 의도가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경쟁구도를 조성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미국은 아마도 고금을 통틀어 전 세계 와인계에서 가장 큰 어부지리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테이스팅의 기획자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는 영국인으로 당시에 파리에서 와인샵과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비즈니스를 홍보할 목적으로 재미있는 구상을 하게 됐다.

바로 프랑스 와인계의 대표적 인물을 모아 시음회를 개최함으로써 프랑스 와인계와 사교계에서 그의 존재감을 높이는 것이었는데, 그런 의도를 가진 그에게 미국의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76년은 매우 흥미로운 해였다.

고급 와인의 생산역사가 거의 전무했던 와인의 신천지 미국, 그중 캘리포니아에서 일군의 열성적 생산자들이 나름 흥미로운 와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한 스퍼리어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 전문인들에게 프랑스 고급 와인들을 시음하는 자리이며, 신흥 산지인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진 와인도 함께 시음한다고만 알려 흥미를 끌게 했을 뿐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 방식의 경쟁적 시음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 꼼수를 부렸다.

레드와 화이트가 각각 10개씩 준비된 시음회에 출전한 프랑스 와인들은 레드 부문의 경우 보르도의 그랑크뤼 1등급 포도원인 샤또 무똥 로칠드와 샤또 오브리옹, 2등급 포도원인 샤또 레오빌 라스까스와 샤또 몽로즈를 제외한 나머지 6개의 와인이 캘리포니아산이었고, 화이트 부문의 경우는 도멘 르플레브, 쇼젭 드루앙과 같은 부르고뉴 특급 도멘들에서 만들어진 4개의 와인을 제외한 나머지 6개가 캘리포니아산이었다.

시음회 현장에서 프랑스의 와인명문가의 와인들과 캘리포니아의 신생 와이너리들에서 만들어진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방식으로 경쟁시음 한다는 진행방식을 스퍼리어가 설명했을 때도 어느 누구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선전을 예상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동요나 이의제기는 없었으며, 기획자 스퍼리어 조차 캘리포니아 와인들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와인의 압도적 우세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화이트 부문에 있어서는 Chateau Montelena Chardonnay 1973, 레드 부문에서는 Stag's Leap Wine Cellars Cabernet Sauvignon 1973, 각각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고, 이 소식은 행사에 참가했던 유일한 언론인이었던 타임즈지 기자 조지 테이버(George Taber)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다.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한번쯤 들어봤을 이 역사적 사건의 기획의도와 결과에 대한 약술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지금부터는 파리의 심판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세계 와인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파리의 심판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편의상 필자는 위에서 미국이 막대한 어부지리를 차지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것은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1960년대 로버트 몬다비와 조 하이츠, 폴 드레이퍼 등의 선구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잔잔하지만 진지한 품질혁명에 힘입어 캘리포니아 와인은 언제든 국제무대에서 대형사고를 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캘리포니아 와인이 미국 내에서 먼저 품질에 대한 인정을 두루 받기도 전에 해외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것인데, 파리의 심판은 오히려 이 점에서 캘리포니아, 특히 나파 밸리 와이너리들에게는 상업적 성공의 초석이 됐다.

파리 테이스팅에서의 성공이 있기 전까지는 캘리포니아 최고의 와이너리들 조차도 유럽산 고급 와인들에만 관심이 있던 미국 최고급 레스토랑에 와인을 파는 것을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1972년부터 와인 판매를 시작한 단일 포도밭 카버네 소비뇽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이아몬드 크릭 빈야드는 오너들이 레스토랑에 와인을 팔기가 어려워 와인을 들고 와인샵들을 전전해야 했었다고 당시를 술회한 반 있다.

파리 테이스팅인 미국 최고 레스토랑의 밀집지인 뉴욕으로 캘리포니아 와인이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인정은 와인생산자들의 품질 향상 욕구를 더욱 자극하였다. 보다 양질의 포도품종들인 프랑스 품종들의 재배면적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고 반대로 지금 보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운 스위트 와인들의 생산량은 빠르게 줄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의 부활은 80년대 이후 같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큰 호황으로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포도밭 면적은 지속적으로 늘고 하나 둘씩 대형생산자가 등장하여 와인산업의 규모적 완성도가 높아졌으며, 최고 품질의 와인이 만들어지는 나파 밸리의 땅값은 80년대 말에는 이미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이 명성 높은 와인산지에서 조그만 땅을 마련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 보겠다는 인생 후반기의 프로젝트로 와인산업에 참여한 이들도 생겨났다. 태생적으로 작은 생산량과 최고 품질을 추구했던 이들 와이너리는 보통 부띠끄 와이너리로 불리며, 이들 중에서 대단히 빼어난 품질을 지녀 애호가들을 열광케 하는 와인들을 미디어에서 따로 컬트 와인이란 용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파리의 심판은 이렇듯 미국 와인의 품질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신흥 와인 생산국들 중에 맏형인 미국의 성공은 다른 후발 국가들에게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됐다. 좋은 포도밭과 양조장을 갖추고 정확하고 부지런히 일 한다면 짧은 와인 역사를 지닌 나라들도 국제무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 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증이 생기면서 이후 세계 와인계는 유럽의 지배력 약화와 다핵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다음호 연재 : 미국 와인의 어제와 오늘Ⅲ

신성호 와인칼럼니스트｜altoman@naracellar.com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