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성아라 인턴기자]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하루에 버스가 단 두 번 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 마을이었다. 또래 친구들도 찾아볼 수 없었던 조용한 마을에서 나는 혼자 놀았다. 내가 하는 일은 학교에 다녀와서 하루 종일 길가에 앉아 신작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몇 대나 되는지 세어보는 일이었다.

마당에 심어진 분꽃과 맨드라미를 바라보거나 개미굴에서 나오는 개미를 관찰하기도 했다. 너무 심심해서 지나가는 차들 중 하나가 우리 집 쪽으로 방향을 돌려 와주었으면 좋겠다거나 사물이나 동물들과도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심심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라고 나온다. 하는 일이 없으면 지루할 뿐만 아니라 재미가 없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심심하지 않다. 심심할 틈이 없다.

학과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취업준비까지 겸하고 있다. 친구와 약속을 잡고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시간에도 전혀 심심하지 않다. 스마트폰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조금이라도 시간이 비면 나는 스마트폰을 꺼낸다. 게임을 하기도 하고 메신저를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페이스북이나 미투데이 등의 SNS를 구경하기도 한다.

기다리던 친구를 만나 카페에 들어간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영화를 보거나 노래방에 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다시 스마트폰을 만진다. 집에 돌아와서는 TV를 본다.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을 하기도 한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심심함을 달래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시간은 무엇을 해서라도, 할 거리를 만들어서라도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누군가 ‘심심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어라고 응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거라도 해’, ‘저거라도 해봐’ 하며 무언가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심심할 시간이 어디 있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상대의 게으름을 타박하기도 한다. 할 일이 없으면 스마트폰을 잡거나 TV나 컴퓨터를 키면 그만이다. 그도 아니라면 친구를 만나도 좋다. 심심함을 채우기 위한 많은 것들일 준비되어 있는 세상이다.

‘심심하다’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음식 맛이 조금 싱겁다’이다. 심심한 시간은 싱거운 음식처럼 어딘가 빠져있는 것 같고 그래서 무엇을 해서라도 채워야 할 것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정말로, 심심한 시간은 어떻게든 채워 넣고 견뎌야 하는 시간일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시간엔 반드시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일까? 심심할 틈이 없는 일상에는 무언가가 들어와 고일 ‘틈’이 없다.

바쁜 시간들, 해야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남들이 다 하는 일들을 한다. 영어 공부를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드라마를 본다. 그러다가 내일의 생활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일상에 틈이 없다면 우리의 생은 남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생일뿐이다.

비어 있는, 싱거운 듯한 그 심심한 시간에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것들을 가져올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좋아하는 음악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아무 목적 없이 그저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때, 몽상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심심함이 가져다주는 작은 틈은 각자의 생을 조금씩 다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심심해지면 사소한 것들이 보인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없는, 그 빈 시간에 우리는 각자 ‘나의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다. 평소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이 들어오고 평소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린다.

얼마 전 새로 생겼던 김밥집의 간판이 치킨집으로 바뀐 것도, 못생기고 뒤틀린 어머니의 엄지발가락에 박힌 굳은살도 비어 있는 시간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모르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한밤중에 가구들이 몸을 비트는 소리도 비어 있는 시간에만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절절한 외로움도 아니고 한없이 자유로운 것만은 또 아닌, 말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도 비어 있는 시간에만 내게 와 닿는 것들이다.

심심함이 없어지니 간절함도 없어진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느낌을 알지 못한다. 오직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거리를 서성거리는 일이 좀처럼 없다. 심심함을 즐길 줄 모른다. 비어 있는 시간을 억지로 채우기 위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디질 못한다.

가끔은 심심해도 좋다. 무언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고 혼자만의 생각 속에 빠져들어도 좋다. 아무 것도 일도 안 하고 있는 시간에 내가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시간은 밀도여서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어떤 일이 반드시 잘 되지는 않는다. 밀도 있게 쓰면 된다.

‘심심하다’의 세 번째 뜻은 ‘깊고 깊다’ 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심심한 시간에 우리는 그냥 보고 지나쳤던 것들의 좀 더 깊은 면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스트레스와 긴장을 잠시 놓고 새로운 마음과 생각이 고여들 수 있도록 나를 풀어 놓을 수 있다. 이는 내 세계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로 꽉 차 있다. 하루에 몇 분만이라도 자신을 위해 ‘심심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아라 인턴기자｜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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