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 바보천치! 내가 나중에 다 말해줄게.”
지금 당장 말해 달라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형님 말을 잘 들어야 해. 그래야 바보천치 널 도와줄 수 있어.”
동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굵어졌다. 탁한 듯싶으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자 다시 원래의 장난꾸러기로 돌아왔다. 여닫을 때마다 삐이익 소리를 내는 대문의 오른쪽 종일 햇살이 떠나지 않는 장독대의 계단에 앉아 턱을 고였다.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 동자의 모습은 장독을 지키는 인형 같았다. 양쪽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채 눈도 깜짝이지 않던 동자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동자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바보천치! 난 천녀의 전생이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동자의 얼굴에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끝을 알 수 없는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천녀의 전생인 난 얼마든지 인간인 천녀를 속일 수 있어. 하지만 천녀는 날 속이지 못해. 또 세 할아버지는 나와 천녀를 속일 수 있어도 우리는 안 돼.”
“무슨 뜻이야?”
“멍청이! 내가 천녀보다 더 높다는 얘기야. 그걸 못 알아들어?”
그들 세계에도 인간 세상처럼 속이고 속는 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넘볼 수 없는 세계였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살해당했을 때 너무도 암담했다. 그 어떤 방법도 쓸 수 없는 혼으로 이승과 저승의 사이, 구천을 떠돌며 온갖 혼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내 몸부림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구천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의 바다였다. 결국 타살의 억울함도 용서하고 혼의 세계로 들어가려다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선 것은 수라 때문이었다. 타살을 자살로 몰아간 언론도, 수목장을 맨 나중에 떠난 여자도, 부모도 다 외면할 수 있었으나 수라는 아니었다. 수라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라에게 다가갈 수 없어 구천을 헤매다가 천녀를 떠올렸고, 때마침 그녀가 내가 죽은 지 사십구일이 되는 날 천도제를 올리고 있어 소원을 말할 수 있었다. 천녀는 나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 흘렸다. 만약 그 자리에 동자가 없었다면 천녀의 축원에 떼밀려 혼의 세계로 들어갔을 것이다.
천녀는 동자의 재촉에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그날 동자의 출현은 큰 행운이었다.
“넌 사랑이 뭔지 모르지? 그러면서 무슨 신녀라고. 축원도 하지 마.”
동자의 훼방에 짜증이 난 천녀가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애원했다. 오래 머물지 않겠다. 딱 백일만 있겠다. 이승에 있는 동안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오직 수라만을 바라보다 돌아올 터이니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뭘 보려고?”
천녀가 앙칼진 눈으로 노려봤다.
“왜?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으면 그 앞에서 히히 웃고 싶어?”
수라의 죽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떠나. 당장!”
천녀의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점이 맞지 않았다고, 틀렸다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도 눈빛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뜻한 차를 권했다. 그런 그녀가 눈에 핏발까지 세웠다.
“안 돼. 당장 떠나.”
그녀의 핏발에 왜 떠나라고만 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때 동자가 밀어냈다. 생글생글 웃으며 팔짱을 꼈다. <계속>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그림｜김동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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