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를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한 절망보다 그치지 않는 비에 더 당황했다. 천녀뿐만 아니라 하늘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가슴 저림으로 어둠을 맞이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천녀의 산속 기도처를 떠나지 못했다.
천녀의 기도처는 동해의 일출, 떠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빛이 가득 차는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있었다.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안락의자 형상의 기도처 전망은 온 세상을 한눈에 굽어보는 듯했다. 천녀는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구천을 떠도는 어느 영혼 천도를 위해, 속세 누군가의 소망 성취를 빌어주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총기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몇 날 며칠 잠자지 않고 기도하는 동안엔 곡기도 끊었다. 그녀는 오로지 바위 한쪽에서 이슬처럼 흐르는 물로 지치는 몸을 지탱했다.
-넌 내가 반갑지도 않니?
-네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데 그렇게 뻣뻣하게 굴래?
지난 십 년간 그녀를 만날 때마다 퉁명스럽게 굴었다. 눈길이 마주치면 마지못해 왔어요? 라는 게 그녀를 대하는 최고의 예의였다. 어떤 때는 기도처에서 쉬고 있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아예 피해버리기도 했다. 저승에서 바라보는 그녀는 숱한 무녀의 하나일 뿐이었다. 다만 다른 무녀와 달리 인간 세상사에서 인연이 있었던 까닭에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것뿐이었다. 간혹 기도할 날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픈 건 아닌지 궁금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없었다.
-기도를 마치면 육신은 반죽음이야. 하지만 영혼은 아주 맑아. 뭐랄까? 머릿속이 시릴 만큼 맑아져서 진저리치곤 해.
속세에서의 삼십이 년, 그 모든 것을 잊고 저승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에는 그녀의 기도는 관심 밖이었다. 이런 내게 그녀는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었다. 저승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빌어주는 기도 한마디 하지 않겠다며 눈을 흘겼었다.
이런 그녀에게 간절히 매달릴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오늘처럼 목이 빠져라, 길게 늘이고 그녀를 기다릴 줄은 몰랐다.
영혼이라고 해서 이승의 모든 곳을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세계에도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경계의 선이 분명했다. 또 인간 세계를 거침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의 구분이 명확했다. 나는 이승의 세계는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영혼이었다. 재수가 좋아 용케 인간 세계에 다가간다 해도 허사였다. 그들을 볼 수 있는 눈이 내게는 없었다. 사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천녀의 눈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만둬.”
수라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나의 죽음을 타살로 몰아간 사람들에게 왜 그랬는지 묻고 싶다는 나를 그녀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승을 떠났으면 그 이유가 여하튼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쓸데없이 나섰다가 저승에도 못 머물러. 더 큰 불행을 자초하지 마.”
그녀는 저승에도 죽음이 있다고 했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영혼이 남지만, 저승에서의 죽음은 완전 소멸이라고 했다.
“영혼의 완전 소멸, 그것은 하늘의 벌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하늘의 벌이라고 말할 때 천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그 눈치에 재빨리 손을 뻗었다.
“내가 그런다고 천녀님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녀가 마주 보던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주 크게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계속>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그림｜김동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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