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남편과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군에 가 있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의 젖은 눈가에는 그리움의 애틋한 미소까지 스며들어 가슴 저리게 했다.
“어르신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관악산의 통나무집 쉼터에서였다. 말없이 커피만 조금씩 마시던 그녀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등산복 차림의 그녀 눈은 그날 따라 눈화장이 짙어 검은 연못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말하는 어르신들이란 시부모인 줄 알았다. 한집에 살고 있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있어 그것이 고맙다는 말인 줄 알았다. 무녀인 그녀의 말에 익숙하지 않은 때였다.
“어르신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없어. 가족들이 나가던지, 내가 나오던지 둘 중의 하나야.”
시부모들이 결혼한 자식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불편하면 분가시키면 될 일을 왜 복잡하게 만드나 싶어 그녀를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녀가 내 표정의 의미를 알아채곤 쿡쿡 웃었다.
“내가 누구야?”
“누구긴요?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여전히 난감한 눈길이자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눈 속에 가득했던 웃음이 사라졌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누구야? 그 질문을 되짚어본 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무녀, 무당임을 떠올렸다.
“난 사람이 아니야. 신의 딸이지.”
천녀는 세 어르신, 세 분의 신을 모시고 있는 딸이라고 했다. 신의 딸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고 했다.
신인 어르신들이 질타하기 전에 알아서 남편과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잘못되거나 자신의 육신과 영혼이 참아낼 수 없는 큰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난 다행히 어르신들이 눈감아 줬어. 남편도 마누라가 무녀라는 사실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고. 아들도 그렇고. 정말 천만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천녀였지만, 그 한숨 속에는 언제 변할지 모를 현재 상황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인간사보다 더 변화무쌍한 게 무녀 세계였다. 하루아침에 신기가 달아나는 것은 물론 어르신들의 심술로 몇 년씩 헛소리나 하는 무당으로 사는 게 그들 세계였다. 어미에게 주었던 신기를 딸에게 주며 돌아앉아 내쫓김을 당해도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제 뱃속으로 낳은 딸이 당당하게 어미를 내쫓아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다고 했다.
천녀는 다른 무녀의 경우를 빗대어 말했지만, 자신도 언제 그렇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나의 청을 거절한 것인지 모른다. 나의 청이 그들의 세계에서 절대로 들어주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라며…….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오금이 저렸다.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죽은 나를 위해 금기사항을 깰 리 없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 게 무녀라지만, 피붙이도 아닌 나를 위해 어르신들에게 버림받는 짓을 할 리 없었다.
바위에서 일어나 천녀가 사라진 산기슭을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지금쯤 속세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달의 칠석날 기도하기 위해 다시 산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방법이던 찾아 그녀의 승낙을 받아내야 한다.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깨끗이 포기하고 영혼마저 버려야 한다. <계속>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그림｜김동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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