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에게 한 번만이라도 간청해줘요. 제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자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가까이 있는 새도, 벌레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피가 터지도록 소리를 질러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다행히 무녀인 그녀만은 생생히 들을 수 있어 귀청 떨어진다고 화를 냈다.
“시끄러워!”
한심한 눈길로 노려보던 그녀가 나무그늘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배낭을 멘 채 무슨 생각인가 골똘히 하는 눈치이더니 마침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인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여객기가 사라지자 한숨을 길게 뱉었다.
숨이 막혔다. 그녀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승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으니 통곡이라도 할 판이었다. 살아 있을 때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서는 무녀의 냄새가 나지 않아 좋았다. 또 정이 넘쳐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배려의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사전의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도 늘 살갑게 맞아주어 기대를 걸고 부탁했는데 그녀의 냉정한 거절에 난감했다.
“알았어요. 차라리 죽을게요.”
천녀 옆에 주저앉았다.
“죽는다고?”
그녀의 기가 찬 표정에 아주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는 죽임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뭐.”
“그래? 그럼 죽어. 자살해.”
“……?”
발칵 화를 낸 천녀는 산에서 내려 가며 한 번도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이내 나무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앉았던 바위에 누웠다. 그녀에게 죽는다고 큰소리쳤지만, 영혼은 죽을 수가 없었다. 신의 손에 의해 연기처럼 사라지면 모를까. 자살로 끊어낼 수 있는 생명이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자살하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절실한 마음 때문이었다. 사랑도, 인생도 어느 것 하나 꽃피워 보지 못하고 떠나온 이승에서의 짧았던 생에 대한 미련의 절실함이 아니었다. 사랑의 과거보다 나의 죽음을 외면한 사라,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나를 죽인 그 누군가의 삶도 궁금했다. 또 타살에서 자살로 몰고 간 기자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천녀의 힘을 빌려 그들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네가 나를 죽였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복수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죽음으로 드러난 수라의 사랑, 그 실체를 뜯어보겠다는 의구심도 없다. 죽음까지도 받아들였지만, ‘왜’라는 이유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의 현실은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의 모습 확인이 오히려 허망과 절망이 될지라도 꼭 살펴보고, 그들의 대답도 듣고 싶었다.
“왜 안 왔어?”
“왜 죽였어?”
“자살에서 타살로 몰고 간 이유가 뭐야?”
“인선이 넌 도대체 누군데 기일마다 찾아와서 우니?”
수라, 그 누군가, 인선이, 기자와 프리랜서, 형사들 그리고 프로골프연맹 사람들과 내 죽음에 빈정거린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 ‘왜’라는 의문을 풀고 싶었다.
이 간절한 소망을 풀려면 천녀의 힘이 절대적인데 도와줄 기미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역정을 내니 민망하면서도 화가 났다. <계속>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그림｜김동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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