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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11회] 노가리 앞에서

내 안의 바다는 너만큼 출렁일 수 있을까 김영미 시인l승인2024.04.12l수정2024.04.1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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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박소향)

노가리 앞에서

노가리에서 염전 바닥을 스치던 바람 냄새가 난다
달빛을 등지고 들어서는 지아비 몸에서 맡던 그 냄새다
탄력 있던 육체는
욕망과 생존의 습기마저 포획당한 채
가지런히 접시에 누워 참선 중이다

구멍 난 삶으로 오염된 상처를 닦아내듯
애증으로 차오르는 가슴에 소주를 부어 넣는다
채우지 못한 내 안의 갈증으로
열기 오른 입술이 접시를 훑는 사이
몸통에 달라붙어 있던 지느러미가 날개를 펼친다

거세당한 꿈으로 가슴은 염전이 되는 동안
어린 명태들이 술잔을 튀어 오르며 파도를 가른다
짠 내와 갯내도 일렁인다

삼킬 수 없는 바닷물처럼
입전만 맴도는 파도 소리 때문에
난 결국 노가리를 씹지 못했고

마른 몸통을 툭툭 분지르는 손끝을 바라보며
깡술을 마신다
간도 쓸개도 버려야 했을 지아비 빈 가슴을 바라보면서

치열했던 삶 가벼이 비우고
바다를 닮아가는 노가리 앞에서
치기 어린 도피를 꿈꾸는 내 독설은 서서히 말라가고
비우지 못한 욕망의 편린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창자 속까지 수분을 비워낸 마른 눈에서
난 왜 자꾸만 바다가 보이는 걸까
알콜로 마비된 가슴의 상처는 왜 자꾸만
몸통을 불리며 파도소리를 내는 걸까

시집 <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 버린다>를 출간 후 출판기념회를 생략한 내게 절친 김경란 시인과 한승희 시인이 출판기념회를 하자고 했다.
‘노을’이라는 라이브주점에서 노가리 안주를 시켜놓고 세 여인은 뮤즈에 젖은 정담을 나누다가 누군가 “노가리 눈이 슬퍼 보여” 했다.

우린 각자 노가리에 관한 시를 써서 함께 논하기로 했고, 그날 귀가하면서 핸드폰 메시지에 쓴 글이 ‘노가리 앞에서’이다. 이 시의 배경은 가정 경제를 짊어진 모든 지아비와 지어미들의 삶이다.

어느 날 내가 근무하던 관공서에 영업을 나온 모 회사 사원이 홍보지를 돌리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자꾸 이러면 업무 방해로 신고할 겁니다”라는 큰 소리가 들렸다.

업무에 바쁜 여직원이 거절했음에도 집요하게 홍보를 했었나 보다. 제삼자가 무안할 정도의 날카로운 소리였음에도 그 영업사원은 부서마다 모든 직원에게 홍보지를 돌리고 나갔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내 남편도 저런 모멸감을 참고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쓰럽고 무거워 보이던 그 뒷모습을 노가리에 환치시켜 쓴 글이다.
치열하게 살다 모두를 비워내고 의연히 누워 바다를 보여 주는 노가리를 두고 누가 ‘노가리 깐다’고 하였던가?

치기 어린 도피를 꿈꾸며 쏟아내는 독설과 허풍으로 종족 번식의 치열한 본능을 이해하고는 있는 걸까?
오늘도 내 안의 바다는 갈증으로 출렁인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지아비와 지어미의 삶은 위대하다는 걸...

시인 김영미
2003년 문예사조에 시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경기 광주지회 9대 지부 회장 역임, 시와수상문학 감사. 시집으로 ‘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 버린다’ 착각의시학 제1회 시끌리오 문학상, 시와수상문학 문학상, 순암 문학상을 받았다.


김영미 시인  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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