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문민순 수필가] 스펙터클한 인생도 액션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이 흘러간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지만 손에 남은 것은 없는 듯하다. 외롭고 허전한 마음 뿐, 하루의 삶이 지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복잡한 세상과 부딪치며 살 적에는 외로움을 느낄 기회조차 없다가 난데없는 질병에 발목이 잡힌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하는 역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혼자서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고립된 채 살아야 하는지,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오늘의 삶이 무거워진다.

어쩌면 이대로 살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괜한 노파심이 든다. 심란한 마음을 잠재울 요량으로 TV를 켠다. 유행이랄까 마치 경쟁하듯 방송사마다 트로트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추억의 잔재처럼 귀에 익은 가사를 흥얼거리듯 따라 부르며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랜다.

눈에 익은 것을 보면 유년의 향수가 떠오르듯 트로트에서는 아쉽고 애틋한 옛사랑의 여운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구성진 노랫가락이 내면에 숨어 있는 감수성을 건드린다. 마치 그 노래의 주인공인 나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스르르 노래 속으로 빠져든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눈 호강도 하고, 시원하게 뿜어내는 가창력에 귀 호강도 하고, 사랑과 이별을 펼쳐내며 가슴 찌릿한 그리움도 불러낸다. 이렇게 한바탕 노래에 휩쓸리고 나면 그늘진 마음에 햇살이 방긋 솟듯 기분이 맑아진다.

대세를 이룬 미스터트롯 미스트롯 남녀노소 펜클럽이 생기고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를 만큼 높아만 간다. 방송사마다 트로트 가수들의 열창이 한창이다. 나 또한 트로트에 마음이 빼앗긴지 오래다. 그 시간이 기다려지고 그들의 노래에 취해 있다. 노래도 노래지만 심사하는 마스터들의 말 한마디도 노래 그 이상의 색깔로 두 귀를 즐겁게 한다. ‘무대를 찢었다.’ ‘소름이 돋는다’ ‘완전히 미쳤다.’ 등등 거칠 것 없는 입담들이 무성하게 흘러나온다.

한때 트로트는 나이 먹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되기도 하고 수준 낮은 음악으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노래방을 가거나 야유회를 가서도 노래시키면 품격을 지키듯 고상한 가곡이나 팝송을 주로 불렀다. 그러던 내가 트로트에 빠질 줄이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네 삶의 애환처럼 들린다. 강하고, 약하고, 높고, 낮고, 그 음정들이 한데 어우러지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맛깔스러운 노래가 탄생 된다. 트로트의 묘미랄까, 바이브레이션 꺾기는 성인가요에서만 들을 수 있는 묘기 같은 것으로 한 서린 애환이 살갗을 뚫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처럼 들린다. 가수들 저마다의 실력을 발휘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법을 개발하여 최고의 에너지와 감성을 동원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목청도 좋고 감성도 좋은 저 타고난 재주꾼들이 지금껏 어찌 숨고만 살았을까. 외로운 이에게는 위로를, 우울한 이들에게는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한때 영주권이 있어 3개월마다 미국에 오가던 때가 있었다. 큰딸은 미국에 있을 때도 내가 좋아할 트로트 노래를 CD에 구워 한 달이면 두세 장을 건네주곤 했다. 타국의 외로움을 탈 것을 염려한 배려였으리라. 얼마 전 미스터 트로트 출신 김호중 노래를 구해달라는 미국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 보니 미국에 살던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왜 트로트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던 친구의 말이 어제의 애환으로 파고든다.

그 옛날 아버지의 18번으로 즐겨 부르던 <꿈에 본 내 고향> <추풍부(秋風賦)>를 듣고 있으면 아버지가 품어주던 사랑이 그리워진다. 뿐이랴, 어머니의 18번 노래인 <해운대 엘레지>는 어린 나도 따라 부를 정도로 귀에 익숙하게 들어오던 노래이다. 특히나 추풍부의 노래는 가사가 마치 시어처럼 아름답다. 사랑과 이별과 한 서린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려온다.

들국화 피인 언덕 송아지 울음소리/ 금물결 십리 벌에 쫓기는 참새 떼들/ 아~아 가을바람/ 석양은 재를 넘고 마을에 연기 나네/ 물동이 이고 가는 삼대밭 오솔길에/ 꼴 베는 저 목동아 무엇을 생각느냐/ 아~아 가을바람/ 구름은 재를 넘고 내 마음 천리라네/ 갈대 피인 시냇길은 옛날이 그리운 길/ 풀벌레 내 가슴에 찬 이슬 적시우네/ 아~아 가을바람.

아버지는 이 노래를 꼭 3절까지 부르시곤 했다. 지금도 이 노래가 가끔 내 입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부모님의 따뜻한 추억을 불러오는 그리움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면 아버지가 보고 싶고 어머니가 생각난다. 문득 친구 은숙이가 그리워진다. 내 곁에 따개비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다. 김현식의 노래 <사랑했어요> 가 표제로 들어 있는 CD를 선물로 주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친구도 보고 싶다.

수필가 문민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이며 한국수필 제5회 독서문학상 대상 수상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4번선 없는 기타ㆍ사랑에는 향기(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