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그 남자가 쓰러진지 어느새 십오 년째입니다. 언제든 일어나겠지 하는 희망과 기대로 살아온 그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어떡하든 남편을 살려보겠다는 진념은 그 오랜 세월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질세라 날마다 마음에 단단한 압정을 꽂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나(필자)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법 없이도 살아갈 만큼 선한 마음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신은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인지, 가끔은 하늘을 우러러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이토록 안쓰럽고 가슴 먹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식물 같은 환자를 십오 년 째 돌보고 사는 그녀의 심적 고통은 오죽할까요.

환자를 돌보려면 자신부터 건강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야속한 세월은 어질고 착한 그녀라 해도 봐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이파엔 골진 주름들이 세월의 훈장처럼 얼기설기 줄을 긋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환자인 남편에게 매달려 사느라 삶의 단맛을 까맣게 잊은 빛바랜 노년의 슬픔 자화상이 아닐는지. 그녀를 보면 잘 살았다고 자부하던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집니다.

나는 그녀를 ‘천사’라고 부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한결같은 마음으로 환자를 지극정성 보살피고 있습니다. 눈 뜨는 아침이면 남편의 손을 잡고 그 뜨거운 체온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녀입니다. 말이 좋아 십오 년이지, 몸소 실행하며 산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라던가요.

주위사람들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요양원에 보내는 게 어떠냐’ 고 걱정하는 말도 그녀의 건강을 염려해 점검해 보라는 의미지 싶습니다. 나부터도 듣기 좋고, 말하기 좋고, 겉으로만 번드레한 허명에 매달려 살고 있는 현실에 몸서리치는 비애를 느낍니다.

오랜 가뭄 탓일까요. 번개가 먹빛 허공에 원한 서린 칼날처럼 새파란 균열을 일으키며 귀청을 찢을 것처럼 우르릉 천둥소리를 내지르고 있습니다. 한 시간 남짓 비가 억수같이 퍼 붓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은 시치미 뚝 떼고 강렬한 햇볕을 대지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도 날씨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손가락 하나도 까닥이지 못하는 몸일지라도 살아 있어주어 고맙다는 그녀의 말은 마치 딴 세상 사람의 거룩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취기랄까, 기분이랄까, 깨달음이랄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찌든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처럼 내 정신까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부디 그녀가 꿈꾸고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대로 잠에서 깨어나듯 툭툭 털고 일어나 그 여자의 남편으로. 두 아들의 아버지로, 듬직한 가장으로 돌아오기를….

수필가 박원명화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