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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의 췌장-림프 등 6종 암투병기 34회] 영정 사진 찾던 날

문인 얼굴 전시회 출품할 사진이라고 둘러대 정병국 작가l승인2021.05.11l수정2021.05.1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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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종일 비기 내립니다.
봄비치고는 굵고 바람까지 불어 산책을 포기하고 커피를 마십니다. 말이 좋아 커피이지, 그냥 밋밋한 커피물입니다. 설탕과 크림을 뺀 색깔도 엷은 갈색이지만, 그래도 없는 듯 있는 커피 향을 즐기려 하루에 두세 잔 챙깁니다.

“만개한 라일락꽃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요.”
울안이 온통 라일락 꽃나무라던, 항암주사를 맞던 옆 병상의 환자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칠십 전후의 그는 생면부지의 내게 만개한 라일락꽃이 필 때마다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 하늘에 묻곤 했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나 인간의 목숨은 참 끈질기다고 덧붙였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오기 전에 준비했던 영정 사진을 찢어버렸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자 허허 웃었습니다. 알아요. 수의와 영정사진을 윤달에 준비하면 오래 산다는 거. 묘까지 만들어 놓으면 더 좋다는 것도. 그렇지만, 팔십은 넘기고 싶은데 영정 사진이 너무 젊어서…….

영정 사진이 너무 젊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2019년 1월 25일 금요일 오후, 충무로에 눈발이 희끗희끗 날렸습니다. 재발한 췌장암과 위와 십이지장 등 소화기관으로 전이된 암 수술이 사흘 후였습니다. 워낙 큰 수술이라 깨어나지 못 할 수도 있다 싶어 준비한 영정 사진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망설여졌습니다.

뭐랄까?
공연히 호들갑을 떤다는 민망함이 앞섰습니다. 거뜬히 수술실을 나올 텐데 왜 지레 겁부터 먹느냐는 자괴감도 슬금슬금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늙은 나이에 너무 걸맞지 않은 젊은 사진을 영정으로 택했다 싶었습니다.

그냥 퇴근하려는데 동갑내기 여류 시인이 들어왔습니다. 편집실에 자주 찾아와 이것저것 도와주는 그녀가 어디 가느냐고 묻자 얼떨결에 사진 찾으러 간다고 대답합니다. 시화전 사진을 여러 차례 찾아왔던 그녀가 그곳까지 동행하겠다며 앞장섭니다.

“수술이 며칠 안 남았네요?”
떨어지는 눈송이를 두 손으로 받으며 묻는 그녀의 말을 외면합니다. 눈치 빠른 그녀는 사진을 보자마자 한마디 할 겁니다. 영정 사진이 그리 급하냐고.

물론 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리 준비해 놓아야 큰일 닥쳐도 자식들이 허둥지둥 헤매지 않을 것이라는 아비의 배려입니다. 수의이든 영정이든 미리 준비해두면 오래 산다는 속설의 기대도 있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지상정이니까요.

“젊고 멋져요.”
만 2년 2개월 전, 영정 사진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던 동갑내기 시인의 말이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 눈길을 피하며 문인 얼굴 전시회에 출품할 사진이라고 둘러댄 말이 가슴 아린 추억이지만, 오늘은 빙그레 미소 짓게 합니다.

그날의 영정 두 장, 동근 통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영정 사진 찾던 날 / 정병국

동행한 시인의 눈길에
잔잔히 스미는 눈물을 외면하며
작가 얼굴 사진전 작품이라고 거짓말한다

눈 오다 그친
겨울의 을지로 건널목에서

둘둘 말은 사진을 빼앗는 여류시인
목소리가 젖었다

영정 사진전도 있어요
표정이 참 아늑해요
일등 상품은 금관(金棺)이겠네요

빈정거림에
아주 어려운 싸움이지만
제대로 한판 놀아보자던 주치의
미소를 떠올린다

이번에도 살아날 수 있을까
췌장암 재발에 소화기관이 쑥밭인데
신은 또 기적의 생명을 주실까

※ 정병국 암 투병 시집 48쪽 전문

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


정병국 작가  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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