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2019년 초봄, 그 사고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마와 눈두덩이, 윗입술과 위 잇몸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낙상(落傷)에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아파트단지를 산책하다 나동그라진 사고였습니다. 겨우 일어나 앉았을 때 비로소 청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 119 부를게요.”
얼떨결에 손을 내저었나 봅니다.
“안 돼요. 얼굴이 피투성이에요. 병원에 가셔야 해요.”
그제야 왼손을 턱밑으로 가져가자 손바닥이 금방 피바다가 됐습니다.

때마침 불법주차를 단속하던 거주 동 경비아저씨의 연락으로 내자와 아들이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아들의 차로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조치 후 심전도와 뇌 등 다양한 검사가 진행됐습니다. 순간의 현기증 낙상은 생각보다 크고 깊었습니다.

찢어진 이마와 눈두덩이, 윗입술의 봉합수술은 끝났으나 잇몸은 퇴근한 치과의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잇몸의 상처가 깊은지 좀처럼 피가 멎지 않았습니다. 지혈 가제를 물면 이내 핏덩어리로 변해 헛구역질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지인에게서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내일, 화창한 벚꽃과 함께 점심 먹자. 항암 도시락 준비할 테니 몸만 나와라. 문자를 다시 읽은 후 지방에 있으니 다음에 하자고 회신하다가 아찔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항암 링거를 맞는 날이었습니다.
오전 10시쯤 채혈한 후 다섯 시간쯤 기다렸다가 항암치료 주치의의 진료를 받습니다. 그러고는 또 대여섯 시간 항암치료실 환자대기실에서 호명 받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채혈한 혈액 검사도, 그 결과의 주치의 처방 수액이 준비되는 시간이 각각 다섯 시간 정도 걸립니다.

채혈에서 진료, 수액 준비까지 열 시간 정도 걸립니다. 여기에 항암 링거를 맞는 시간이 세 시간 반이니 정말 지루한 진료 일정입니다. 주치의 진료 후 항암 링거 주사 때까지의 공백이 길어 암병원의 작은 동산에서 일광욕을 즐기곤 합니다.

그날도 지루한 시간을 동산 벤치에서 달래다가 항암치료실로 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혔습니다. 머릿속은 뇌성벽력에 맞은 듯 시뻘건 불바다가 되면서 무서운 속도로 회오리쳤습니다. 다행히 곤두박질치지 않았지만, 동산의 난간을 등지고 주저앉아 토악질해댔습니다.

이런 고통은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도 겪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빈혈이 많이 개선되어 픽픽 쓰러지지 않습니다. 걸음 속도도 제법 붙어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며 걷기도 합니다. 2021년 가을쯤에는 뛸 수 있을 겁니다.

은행나무 단풍이 지천인 가로수 길을 달릴 것입니다.

빈혈의 습격 / 정병국

항암주사 예정은 오후 5시경
그때까지의 공백 시간에
긴 복도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가
병원 동산공원으로 간다

시원한 바람과 풀내음
새소리에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급히 벤치에서 일어서다
회호리치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육신
겨우 안전 목책을 잡고
때마침 지나치는 사람에게
다급히 도움 요청한다

암병원 2층 항암주사실
왼쪽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수만 개의 바늘이 찔러대는 듯한
고통에 눈을 감는다

빈혈이 심각해 수혈 검토 중입니다
혈액종양과 주치의 진단
새파란 유리 파편으로 가슴에 박힌다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