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지하철의 객실, 노약자석에 앉자마자 휴대폰부터 엽니다.
카톡, 딸아이가 보낸 외손자 형제의 사진이 방에서 거실로, 아파트 밖으로, 공원으로 이어지며 할아버지의 미소를 끝없이 끌어냅니다. 사진의 중간에 땅콩처럼 박힌 동영상은 아예 “하하! 고놈들!” 탄성을 터트리게 하지만,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외손자 형제의 재롱입니다. 큰놈이 다섯 살, 작은놈은 두 살인데 어찌나 재롱떨며 잘 노는지 상상 초월입니다. 이래서 옛 어른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셨나 봅니다.

췌장암 재발 등 다종 중증암환자라 지하철의 객실에서 곧잘 잠이 듭니다. 뭐랄까? 마치 혼절하듯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나지만,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떤 때는 이번 역에 내리면 되는데 잠이 들어 두세 역을 지나치기도 합니다.

3, 4호선 환승 충무로역을 또 지나쳤습니다. 외손자 형제의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에 현혹되어 지하철역 안내방송을 듣지 못했습니다. 동대문역사공원역과 동대문역에 멈췄던 것도 몰랐다가 혜화역에서 서둘러 내렸습니다. 그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퇴근길에 열무시래기가 구수한 감자탕을 사 온다는 말끝에 놀림 한마디 합니다. 외손자 사진 보다가 내려야 할 역을 잊어버리는 건 아니냐는 말에 이실직고합니다. 이미 지나쳤다며 되돌아가려고 반대편 승하차장으로 가는 중이라 말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여동생은 아들이 둘인데 마흔 하나의 오빠는 아직도 미혼입니다. 이미 마흔, 불혹 나이를 넘어섰는데 결혼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거두절미하고 “결혼할 거야, 말 거야?”라고 단도직입으로 묻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지난 17년 동안 가족사가 평탄치 않았습니다. 2004년 애들 엄마의 위암 수술에 2008년 1월 나까지 췌장암을 수술하면서 단란했던 가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그 와중에 고령의 할아버지 운명 등 대소사로 아들과 딸도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부모가 암 환자. 더구나 췌장암은 완치 불가라 할 만큼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수술해도 예후가 안 좋아 대부분 일이 년 안에 사망하므로 하늘의 절체절명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한 상황의 췌장암 환자 아버지를 지켜보는 아들은 직장 생활에 충실하며 의연한 척 했으나 이는 겉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경남의 밀양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다시 부모의 거주지 과천에서 지척인 군포로 회사를 옮겼습니다.

거주도 회사의 사택에서 아예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귀가(歸家)를 든든해 하다가 뒤늦게 후회하며 탄식했습니다. 이 후회와 탄식은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난형난제입니다.

애당초 아들의 귀가 입주를, 너의 수발이 아니더라도 우리 부부의 암 투병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부모의 암 완치는 오로지 너의 결혼 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다고 으름장에 억지까지 부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냉큼 받아들였으니…

인생사에서 이미 지난 일을 ‘가령’으로 바꿔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 아들의 효심 ‘귀가 입주’를 막았다면 이미 친손자 손녀도 보았을 겁니다. 딸처럼 행복한 아들의 가정에 우리 부부도 여느 부모들처럼 흐뭇한 나날일 겁니다.

자꾸만 부모의 암 투병이 자식 놈 결혼까지 막았다는 자책감에 애꿎게 하늘을 원망합니다. 이제라도 결혼 분가를 시켜야 하는데 그날이 언제일는지 난감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만 됐다. 하루빨리 결혼해서 네놈 가정을 꾸려!” 호통으로 강권하는 것인데…

‘아들의 연인’

이슬비가 내리는
암 병동 옆 작은 동산
함께 걷는 아들 눈치를 봅니다

그때 꼭 헤어져야 했니
결혼은 할 수 없었던 거니

시부모 될 분들이
위암에 췌장암 환자라서 떠났다면
미안하구나

아예 아무도 올 수 없는
깊은 산중에서 요양했다면
도시의 너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구나

자문자답의 아픈 눈길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아들 눈치를 보다가
하늘을 원망합니다

꼭
그리하셔야 했습니까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