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일요일 오후, 가을 햇살 속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긴 줄 끝으로 갑니다. 며칠 전에도 이 줄에 서서 한 이십 분쯤 차례를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섰습니다. 앞의 손님이 계산할 때 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황망히 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찹쌀 도넛, 찹쌀 꽈배기, 찹쌀 핫도그의 독특한 향기가 허리춤을 잡아당겼습니다. 힐끔 돌아보자 간판의 한쪽에서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도넛 명장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갓 튀겨낸 꽈배기에 하얀 설탕을 듬뿍 뿌려 먹었던 어린 시절의 그 맛이 새록새록 다가와 유혹합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더니 칠십 중반의 노인네가 밀려오는 미련에 헛기침합니다. 그까짓 거 한두 개 먹는다고 당뇨 합병증이 발병하는 것도 아니고…또 복부 영상촬영 때문에 금식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랴 싶어 줄 끝을 바라다봅니다.

줄이 S로 길게 늘어섰습니다.
어림짐작으로 반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차례가 될 것 같아 발길을 돌립니다. 노점 과일가게를 지나면서 ‘식후 곧바로 과일을 들지 마세요. 당 수치가 확 올라가니까요.’ 내분비대사내과분과 의사의 말이 떠올라 허허 웃습니다.

다중암환자이기 때문일까?
꼭 먹을 것도, 꼭 가려야 할 음식도 참 많습니다. 무엇을 먹고 피해야 할지 헛갈려 식단차림표를 하나하나 짚어본 게 몇 차례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병원에서 별도 교육까지 받은 후 자가 체크 혈당 기록지에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세심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식전과 식후의 혈당 체크를 합니다. 췌장암 재발로 2차 절제수술까지 받은 까닭에 당 수치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현재까지는 정상인보다 더 정상일 만큼 안정적이지만, 식단 지키기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중독이라 할 만큼 운동을 하다 보니 허약했던 근력도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식품점에 들려 두부, 버섯, 감자 등 청국장찌개거리를 삽니다. 오늘은 돼지고기 수육에 꽈리고추 멸치 졸임, 가지나물, 마른 김 중심의 저염식(低塩食) 저녁을 먹으렵니다. 밥은 당연히 현미, 흑현미, 흑보리, 검은콩, 녹두 등 일곱까지 곡식으로 짓습니다. 입맛이 너무 없다 싶을 때는 더덕을 첨가하기도 합니다.

식품점에 들릴 때마다 갈등의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찹쌀 꽈배기만큼이나 유혹하는 것은 바로 우동, 칼국수, 콩국수 등 면 종류입니다. 특히 김치찌개용 칼국수의 유혹은 가히 진저리칠 정도입니다. 비곗살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얼큰한 맛에 밥을 비벼 먹다가 칼국수로 마무리하는 식탁은 가히 환상적일 수밖에요.

그러나 암환자가 된 십 수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수저를 댄 적이 없습니다. 너무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은 절제하라는 권고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오늘도 그 충고에 충실한 환자로 암병동 입원실의 식단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새끼손가락 한마디도 안 빠질 종지 서너 개의 반찬, 샘물 같은 멀건 탕에 유아 이유식 같은 흰죽 앞에서 한숨짓던 식단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이도 부족해 CT 등 영상촬영으로 병상 머리맡에 걸어놓는 ‘금식’ 카드는 절망일 수밖에요. ‘물도 안 됩니다’의 빨간 글씨는 아득한 벼랑으로의 추락입니다.

금식?
입원실에서건 통원치료 중이건 영상촬영이 끝나도 사람을 초긴장으로 몰아갑니다. 내일 영상 촬영이 아침 일곱 시이므로 밤 열한 시부터 금식하면 됩니다. 이번 금식은 여덟 시간입니다. 다행히 ‘물도 안 됨’의 붉은색 경고가 없는 금식입니다.

해 지기 전에 저녁을 끝내고 커피 대신에 보리 새싹 차 한 잔 하렵니다.

‘인동초 꽃씨’

금식
채혈
영상 촬영

의학박사 천재들은
언어 저능아
세 단어밖에 모른다

그래도 어쩌면
퇴원이란 말 밤샘으로 익혀
오늘은 자랑할까
회진 기다리는 가슴

겨울 하늘에
한 땀 한 땀 주사바늘로
인동초 꽃씨를 심는다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