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전미야 작가] 온 종일 비가 내린다. 찻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무연한 눈길을 창밖으로 던진다. 작은 오디오에서는 귀에 익은 가곡이 흘러나왔다. 빗속에 잠긴 회색 도시의 한 구석. 또 하나의 그리움으로 미처 잊었다는 생각조차 없었던 기억들을 더듬는다. 사람은 그리움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 어느 하루, 가죽 공방에 가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어서 두리번거리다 보니 조그만 기기(器機)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좀 진기해 보이기도 해서 이게 뭐냐고 물음을 던지니 오디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내 관심의 정도를 눈치 챘음인지 이미 단종이 된 제품이라 구입하려면 중고를 알아봐야 될 것인데 값도 생각 외로 고가라고 덧붙였다.

꼭 어릴 때 보던 트랜지스터라디오 같기도 하고 그만큼이나 작은 오디오. 그럼에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질은 생각 외로 좋았는데 그도 그렇지만 단종이 되었다는 말 때문이었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그 생각이 놓아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망설이던 끝에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는 하나 구입해야겠다며 알아봐 달라 했더니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쯤은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 나이가 되면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의 마음이 훤히 읽히지 않던가. 그런 이야기에 아들의 목소리가 경쾌해지는 걸 보니 자식들한테도 무조건 사양만 할 게 아니구나. 저렇게 행복해 하는데 싶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택배가 와 포장된 상자를 풀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쩜 내가 원했던 것 그 이상의 미니 오디오가 배달돼 온 것이었다. 디자인도 내 집의 기존 가구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최신형의 디지털제품이면서도 아날로그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하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얼른 전원을 연결시키고 작동을 시켜보니 흘러나오는 미려한 음질의 그 울림이 단박 가슴을 흔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지나간 추억들을 소환하는 데는 음악만 한 것도 없는 성 싶다. 물론 영상물이나 다른 매개체들도 있지만 음악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영상물의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눈으로 보이는 그 영상으로 하여 추억 속의 영상을 불러오는 데 제한을 받게 된다. 더군다나 내 나이 정도의 사람들은 영상 보다는 밤늦은 시간이면 조그만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끼고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향에 가슴 설레며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이다.

예전에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게 되면 그 하나하나와 관계되고 얽혔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유독 어느 노래를 잘 불렀던 사람이 떠오르고, 여행지에서 함께 들었던 노래가 그 누군가와의 여행을 떠올리게 하고, 돌아서던 길에 들려오던 노래에 더더욱 눈물을 펑펑 쏟았던 아픈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그런 그리움과 소환해낼 추억이 없다면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건조할까. 모를 일이다. 훗날 내가 세상에 없을 때 아들이 이 오디오를 버리지 않고 있다가 문득 작동을 시키며 오늘의 이 어미를 소환해낼지도.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데 눈물 한 방울, 손등에 툭 떨어진다.

그림=김태원 화가
전미야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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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야 작가는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예술의 다재다능한 작가로서 시, 수필, 소설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