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빠져나오려고 하면 기미지옥처럼 또 모래가 무너져 빠지고 또 빠지고 그랬다. 그러고 보니 아래서 누가 자꾸 나를 잡아당겼다. 오빠였다. 나는 오빠를 밀쳐냈다. 몸 위로 우르르 모래가 쏟아졌다. 몸이 눌려 무거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숨 막혀! 엄마! 살려줘! 꿈이었다.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을 꿨어요. 엄마한테 갈라 그러는데 꿈에 오빠가 나를 잡고선 엄마한테 못 가게 해요.”

“그럼 저 아저씨하고 와라.”

수염이 허옇게 꺼칠꺼칠 솟아있는 웬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방구석에 서서 나를 쳐다봤다. 엄마가 오빠랑 방을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간다고 했다. 엄마가 나가자 그 아저씨가 내 몸을 내리 눌렀다 겁탈하려는 것 같았다. 가만있어. 간첩죄에서 풀어주려고 그래. 나는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아! 아파! 아래가 너무나 아파 퍼뜩 눈을 떴다.

셰익스피어의 눈이 바로 내 위에서 마주쳤다.

어느새 그의 몸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의 윗도리와 브래지어는 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침대가 출렁거리며 꺼억! 꺼어억! 소리를 냈다.

머리 위에서 가방이 위 아래로 흔들거렸다. 엄마가 흔들흔들 춤을 췄다.

“엄마, 내가 그놈한테 복수한 거야. 어때, 막장 드라마 같은 멋진 복수가.”

“처녀였어요?”

그가 스탠드를 켜고 티슈를 뽑아 자기의 그것과 축축이 젖은 침대 시트를 닦다말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어떡해요!”하고 머리를 잡고 탄식했다.

픽 헛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미안해요. 내가 실수 했어요.”

점점 웃겼다.

셰익스피어는 자기는 순결한 처녀를 건드린 몹쓸 놈이라며 난감해 했다. 자신은 비록 이혼했지만 중학생 아들이 둘이나 있다며, 또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도 했다. 책임을 지라면 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가진 게 없다는 둥. 능력이 안 된다는 둥, 그래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는 둥, 자기는 종가 집 종손이라는 제사가 엄청 많다는 둥 하며 한참을 횡설수설 변명도 아닌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종가집이라고요?”

“제가 종손이라니까요.”

“그럼 족보 있어요?”

“있기만 하겠어요. 다 외워요.”

그는 허공에 어린아이의 키를 높이를 만큼 손으로 표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요만할 때부터 할아버지가 족보를 펼쳐놓고 다 외우라고 시켰어요. 틀리면 얼마나 혼났는데요. 지금은 좀 까먹었지만 그래도 위로 5대조까지는 다 외워요.”

그는 자신의 가문이 몇 번이나 정승이 나온 엄청난 양반가문임을 자랑했다. 그리고 누워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곧 잠이 들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주민등록등본을 꺼내어 엎드린 채로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꿈에 본 그 아저씨가 문득 떠올랐다. 까칠한 하얀 수염.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이 났다.

일학년 때인가? 학교 갔다 집에 오니 여름인데도 평소와 달리 방문이 꼭 닫혀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불도 안 켜고 어둑하니 그늘진 방에 엄마랑 웬 낯선 아저씨가 마주 앉아있었다. 아니 아저씨라기보다는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나는 엄마 옆에 가만히 앉았다.

“아! 얘구나.”

그 할아버지는 나를 찬찬히 보더니 팔을 내밀어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는 수염이 거칠거칠한 얼굴로 내 뺨에 뽀뽀를 했다.

“아! 따가워요.”

내가 찡그리며 움찔하고 피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 사람이 호탕하게 웃었다.

“너 뽀뽀에 대해서 아니? 이렇게 손에 하는 거는 존경하는 사람한테 하는 것이고...”

하며 그는 내 손을 잡고 또 뽀뽀를 했다. 이어서 코에 눈에 이마에... 하면서 하나하나 뽀뽀에 대해 설명을 해 나갔다. 그때마다 그의 수염이 살을 찔러 나는 따가워서 찡그렸고, 그 사람은 재미있어 하며 일부러 더 자신의 수염을 내 피부에 문지르기까지 하며 장난을 쳤다. 엄마는 처다만 보고 웃지는 않았다.

“아저씨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좀 나가서 놀다 와라.”

엄마의 그 말에 그 사람은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어마의 표정이 뭔가 어둡고 착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한참 있다 돌아오니 그 아저씨는 없었다.

어쩌면, 그가 주민등록 속의 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음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빨간 스웨터와 멋진 체크무늬 모직 바지, 가장자리에 빨간 털이 붙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고급 운동화도 한 켤레 사주었다. 명절이 되도 바지 하나 얻어 입을까 말까였던 내게 그렇게 한꺼번에 여러 개의 옷과 신을 사준 적은 내 일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