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 4千字소설 제27화] 아들의 연인

결혼하지 않는 사랑도 멋진 낭만이죠 정병국 작가l승인2018.06.14l수정2018.06.1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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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가늘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며칠째 내리는 봄비였다. 긴 가뭄 끝의 단비라 반가웠지만, 길어지자 하늘을 쳐다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 아이가 오는 주말에는 해가 나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천둥 번개까지 치며 법석 털었다.

통나무집 현관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다가 천막작업장으로 건너갔다. 눈비와 땡볕을 피하고자 쳐놓은 천막은 작은 작업장이자 내방객과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었다. 천막 안에서는 아주 조그만 목각인형이나 장승을 깎았다. 솟대도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방문객에게 선물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죄송해요.”

그 아이, 외아들의 여자 친구인 소은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 나타났다. 붉은 우의를 벗더니 배낭에서 크고 작은 통을 꺼내놓았다. 통나무집 주방으로 가 프라이팬을 가져왔다.

“아버님! 우리 녹두빈대떡에 막걸리 마셔요.”

소은은 뚝딱 빈대떡을 부쳐냈다.

“아드님이 오늘도 저 버렸어요.”

소은은 막걸리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이제부터 소은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마치 친아빠에게 오빠의 살갑지 않은 정을 고자질하듯 아들 녀석의 무뚝뚝한 말투에서부터 회사 일 핑계로 번번이 바람 놓은 것까지 일러바칠 것이다. 일 년 전이었나. 너는 예비 시아버지에게 보고하는 연애만 하며 살 거냐고 묻자 아니라면서도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무엇인가 감추는 기미가 엿보였으나 꼬치꼬치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소은이의 이야기마다 말꼬리를 잡을 참이었다.

“오빠가요. 요즘…….”

녹두 부침을 뒤집는 소은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조심스러운 얘기를 하기 전에 취하는 예고 조치였다. 소은이가 ‘오빠가요. 요즘’이라든가 ‘있잖아요. 아드님이요.’라는 말 뒤에는 늘 예민한 내용이 이어져 신경 쓰였다.

“오빠가요. 요즘 이상해요. 회사를 그만두려나 봐요.”

오늘도 회사 핑계를 댔지만, 속초에 간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가 말하지 않는 비밀의 답을 내게서 찾으려는 눈빛이었다. 내심 요놈 봐라. 녹두빈대떡과 막걸리가 심리전의 미끼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역공에 들어갔다.

“너, 그 녀석 연인 맞아?”

“예……?”

“너희 십 년째라고 했지? 연애한 지가.”

소은은 눈치 싸움을 재빨리 포기했다. 드러난 속셈을 아닌 척 시치미 뗀들 승산 없다고 판단되자 오빠에게서 들은 얘기가 없으시냐고 노골적으로 물었다. 짐작되는 게 있었으나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처진 천막을 장대로 들어 올렸다. 고였던 빗물이 와르르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회사를 그만두려는 거 정말 모르세요?”

소은은 프라이팬에 돼지고기 비계를 올리더니 불꽃을 조금 키웠다. 비계 기름 녹는 소리가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와 하나로 어울려지면서 막걸릿잔을 단숨에 비우게 했다.

“오빠가 비밀로 하라고 강요했어요? 그래서 감추세요?”

이번에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아들로 만들며 대답을 유도했다. 아들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 태풍으로 부러진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운반하는 것에서부터 등산로 입구에 세우기까지 장승 제작 과정을 촬영하여 해외 다큐멘터리 공모에 출품했다.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관심 있는 작품으로 부상하자 이듬해에는 솟대를 제작하더니 입선했다. 5분짜리 흑백이었다.

“아버님!”

소은은 대답을 재촉했다. 속이거나 감출 생각은 아예 마시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다큐 영상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으로 평생을 살 아들은 아니었다. 우선 다큐멘터리 제작은 생계수단이 될 수 없으므로 취미 정도의 영상예술로 접근했을 텐데 마치 다큐멘터리 촬영 작가가 되려나보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소은이가 혼자 통나무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불안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두었어도 벌써 두었어야 할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들도, 소은이도 결혼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답답하여 물으면 아들은 알아서 할게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다고 소은이에게 너희는 평생 연애만 할 거냐고 야단칠 수도 없었다.

“소은아!”

아들이 처음 인사를 시켰을 때 이름을 물은 게 계기가 되어 계속 소은이라고 불렀다. 아가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결혼하여 며느리로 들어올 때까지 보류했다.

“소은아! 어느 시인의 얘기인데…….”

칠십이 넘은 시인에게 혼기를 한참 넘긴 아들이 있었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들과 담판 지려 술자리로 불러냈다. 아들은 왜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하느냐, 호통치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시인은 결혼이 두려워 포기했다는 아들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날, 시인은 아들의 대답에 가타부타 따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 없어 두려운 것이냐. 부딪쳐보지도 않고 비굴하게 아버지 뒤에 숨어서 나이만 먹느냐. 어차피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 했으니 남들처럼 결혼하자고 꼬드기지도 않았다. 두려워 포기했다는 말 속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소은아! 너는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소은은 빈대떡 부치던 손길을 멈추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빗줄기 속으로 한 무리의 등산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빗속의 산행이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듯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갔다.

“저 사람들, 꼭 아이들 같아요.”

소은이가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빗속의 산행이 물장난만큼이나 좋은가 봐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정말 신났다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이유를 줄줄이 나열한 것 중 편하게 살고 싶어서라는 몇 글자가 아픔으로 다가왔다. 남편감을 1등급에서 15등급까지 평가했는데 핵심은 경제력과 학력이었다. 그 기준이라면 중소기업체의 정규직 청년일지라도 결혼은 그림의 떡이었다. 경제력과 학력이 좌우하는 결혼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혼자 편하게 살겠다는 대답을 탓할 수 없었다. 오히려 슬픈 현실에 기가 막혔다.

“소은아! 그놈은 몇 등급이냐?”

앞뒤 설명 없이 불쑥 물었다. 소은은 몇 등급이라니요, 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쿡쿡 웃었다.

“궁금하세요?”

“그래. 아주 많이.”

정말 궁금했다. 비록 마흔이 코앞인 아들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왔고 연봉도 일억 가까이 되므로 상급에 속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소은은 쿡쿡 웃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버님! 어떻게 해요? 실망하실 텐데…….”

소은은 말꼬리를 감추며 빈대떡을 뒤집었다. 마지막 부침이었다. 큰 접시에 여러 장의 녹두빈대떡이 쌓여 있었다. 소은은 위생 비닐봉지에 빈대떡을 한 장씩 챙겨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었다.

“출출하실 때 한 장씩 덥혀 드세요.”

“그래. 그건 알았다만, 도대체 몇 등급이냐?”

소은은 어리광부리듯 코를 찡긋거리더니 아예 등급에 들지도 못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가요, 평생 연애만 하재요.”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예! 그래서 신랑감 등급이 없어요.”

당연한 일처럼 미소 짓는 소은을 외면했다. 그놈이 정신 나갔다는 말도 못 하고 축 처진 천막을 장대로 들어 올렸다. 천막에 고였던 빗물이 와르르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서른아홉의 아들과 서른다섯의 소은 두 사람은 다 앞가림할 수 있을 만큼 능력도 충분히 갖췄는데 결혼하지 않겠다고? 문득 칠흑 어둠 속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천막 기둥을 잡았다.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가 갑자기 굵어졌다. 조금 남은 막걸리를 따른 소은이가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버님! 결혼하지 않는 사랑도 멋진 낭만이니까 전 괜찮아요.”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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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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