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맞은편 노약자석의 잠이 든 노인을 살펴본다.

전동차의 객실 냉방이 너무 강한가. 노인은 팔짱을 낀 채 잠이 들었다. 칠십이 훌쩍 넘었을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릎에는 읽던 신문과 목에 건 안경이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

어디 사는 노인일까?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했을까? 옆의 두 노인과는 어떤 사이일까? 매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천안으로. 평택으로, 온양으로 몰려다니는 친구일까?

갑자기 밀려오는 졸음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며 맞은편의 노인들부터 확인했다. 세 노인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출입문 쪽 자리의 노인이 슬며시 눈 뜨며 말을 걸어왔다.

“영감은 혼자요?”

눈길이 마주친 노인의 말에 옆자리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앉아 있었던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면 우리와 같이 갑시다.”

노인의 말에 가평 친구와의 약속을 깨기로 했다.

“우린 춘천 막국수 먹으러 갑니다. 생각 있으면 붙어요.”

가운데 자리의 노인도 눈을 뜨며 부추겼다. 합류하기로 마음먹은 김에 점심 대접하겠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들에게 푹푹 삶은 돼지고기와 빈대떡 안주로 막걸리를 대접하면 살아온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을 것 같았다.

“초자 영감의 신고식이다?”

초자 영감이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육십 대 중반이니 초자 영감은 맞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처음 들으니 신기했다. 한 번도 늙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현재도 현역으로 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를 잊고 살아왔다. 머리와 수염이 백발이지만, 그건 단순히 겉모습일 뿐이었다.

“군대는 갔다 왔소?”

내내 자던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자면서도 귀는 열어놓았던 모양이다.

“그쪽은 훈련소를 갓 벗어난 이등병인데 어찌 얻어먹소? 내가 살 테니 따라붙기나 하소.”

육십 대의 초자 영감은 이등병이며 칠십 대는 일병, 팔십 대는 상병, 그리고 구십이 넘어야 병장이라며 자신들은 일병 중고참이라고 했다. 정말 재미있는 호칭이었다.

경춘선이 전철로 바뀐 후 자주 춘천을 찾는다고 했다. 그들은 초자 영감인 나를 위해 소양강댐의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식당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막걸리로 목마름을 달랜 김 일병이라는, 처음 말을 건 노인이 일행을 소개했는데 참으로 황당했다. 세 사람은 오랜 친구가 아니었다. 전철에서 인연을 맺은 그들은 성 뒤에 공(公)을 붙여 김공, 이공, 박공이라고 부르면서도 서울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다만 휴대폰으로 매일 아침 통화하며 그날 갈 곳을 정했다.

그들은 신상에 대해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철칙이었다. 만날 때마다 세상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지만, 서로 어떤 환경인지 몰랐다. 그러면서 어떻게 함께 지방 도시로 나들이하며 식사를 할 수 있을까, 불가사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관계가 황당하다는 표정인데 이등병도 곧 그렇게 될 거요.”

“하긴 금방 칠십이 될 테니까.”

“너무 삭막하게 얘기하지 말아요. 늙은 인생도 재미 좋다고 해요.”

세 사람이 한마디씩 하며 약속이나 한 듯 막걸리를 마치 차 마시듯 조금씩 마셨다. 단숨에 잔을 비우지 않았다. 불편했지만, 그들의 흉내를 내며 갈증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참 빨라! 세월이란 놈.”

김공의 말에 두 사람이 허허 웃었다. 세월 앞에 인생이 허망하다는 웃음이었다.

“내일은 더 빠를 걸. 모래는 더욱더 빨라지고.”

이공이 거들자 박공은 잔마다 막걸리를 채우며 엉뚱한 제안을 했다.

“우리 오늘은 철칙을 깹시다. 신세타령 한번 하자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말없이 소양댐 호수를 바라다보았다. 초여름의 호수에는 물오리 한 마리 놀지 않았다. 구름과 산이 가라앉은 모습도 보이지 않고 검푸른 물결만 출렁거렸다.

박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어요.”

마냥 놀 수만 없어 학교 앞의 문구점을 인수했다가 이년을 못 넘겼다. 이번에는 체인점 건강식 식당을 개업했다가 크게 당했다. 임대에다 체인점까지 모두 사기당하면서 삼십 년의 퇴직금을 다 날렸다.

정말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일자리를 구하려 동분서주했지만, 경비 자리 하도 얻지 못했다. 용케 심부름센터의 배달원으로 들어갔는데 돈벌이라는 게 고작 점심값 정도였다. 그나마도 일의 배정이 자주 돌아오지 않아 하루 한 건밖에 못 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런 날은 자장면값도 못 벌었다. 다행히 집사람의 연금이 있어 굶지는 않지만, 눈치가 보여 밖으로만 나돌고 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이로 추락했어요.”

시종 창밖을 내다보던 이공이 헛기침을 했다.

“나도 한마디 하죠.”

어찌 보면 신세타령이 아니라 복에 겨운 소리인 줄 모르지만, 그냥 들어주소. 노후를 편안히 보낼 정도의 준비는 돼 있소. 적어도 죽을 때까지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만큼 챙겨놨어요. 보험도 서너 개 돼 내가 죽으면 자식새끼들에게 제법 목돈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요. 마누라나 자식 놈 모두 남처럼 살고 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모든 걸 다 원점으로 돌리고 싶소. 결혼 이전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겁니다.

난 지금 혼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소. 새끼들이 셋이지만 나와 살겠다는 한 놈도 없소. 마누라는 늙어서까지 남편 수발하기 싫다며 미국에 있는 딸년에게로 갔소. 회사를 물려받은 큰놈조차 강압적으로 부르기 전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 이젠 포기했소이다. 그냥 마누라도 자식새끼도 없다. 오직 나 혼자이다. 그러나 외로워하지 말자. 열심히 밥해 먹고, 열심히 돌아다니며 건강이나 챙기자. 이게 바로 나요.

“모든 게 다 늙은 죄죠.”

두 사람의 아픔을 늙음의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은 김공이 막걸리 한 병을 더 가져왔다. 빈 잔마다 넘치게 따랐다.

“자자! 한 잔씩 쭈욱 비우고 다 잊읍시다.”

그의 눈가가 촉촉했다.

“이등병도 마시고.”

김공은 단숨에 잔을 비우곤 다시 잔을 채웠다.

“어찌 다들 그 모양이요. 하긴 나도 마찬가지요. 딸이 하나 있소. 마누란 위암으로 갔소. 오 년 전이요. 아내 치료비로 전세금마저 날아가자 딸년 집으로 들어갔어요.”

딸도 사위도 잘해 주어 큰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안사돈의 건강이 나빠지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지하 방이라도 얻어 나가야 하는데 보증금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댁에 대한 딸아이의 마음고생이 컸다. 내 문제로 딸과 사위의 다툼을 목격한 후 가출하려 했다. 이를 눈치 챈 딸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딸과 사위가 두 부모를 한 집에서 모실 형편이 아니니 정말 난감하다. 요즘 난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한다는 짓이 겨우 이렇게 지하철 나들이를 할 뿐이다.

“오늘도 그래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김공이 이등병은 얘기 안 해도 된다며 이공과 박공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두 노인 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노년의 아픔을 이야기할 나이가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과 눈길에서 따뜻한 배려가 묻어났다. 오늘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자 앞으로 전철 여행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세 노인과는 서울로 올라갈 전철을 함께 타지 않았다. 그게 예의인 듯싶어 춘천 시내에 볼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공지천으로 향했다. 의암댐 만수로 옛날의 공지천 모습은 사라졌지만, 탄통 뚜껑으로 만든 썰매를 타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나고 싶었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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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