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장미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걸개 시화 옆에 걸었다.

여인은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읽다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이윽고 눈을 떴다.

“친구분 작품인가 봐요?”

여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눈가가 촉촉한 젖어 있어 여인이 장미꽃을 걸어준 시화를 쳐다보았다. 눈 속에 핀 꽃 사진 아래 ‘절규’ 제목의 시를 빠르게 읽었다.

혹한 속/ 애처로운 너의 모습// 어찌하다/ 눈 속에 홀로 피어나/ 피를 토하듯 떨고 있나// 다가서면 들리는/ 절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묵상 속의 절규// 아 저 침묵의 고행 속/ 사랑의 연인은 누구일까

4연 10행의 짧은 시는 한마디로 애절했다. 이름 옆의 엷은 미소를 띤 시인 사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시가 참 많이 아프죠?”

여인이 시인의 사진처럼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시인이 아픈가 봐요. 아주 많이…….”

여인은 어제 오후, 관악산 등산로 초입으로 산책을 나왔었다고 했다. 물이 조금밖에 흐르지 않는 계곡 풍경의 실망을 걸개 시화전이 말끔히 풀어주었다고 했다. 케이블카 건물의 철망 울타리에 전시된 시화를 한 점, 한 점 감상한 후 돌아갔다.

늦은 밤이었다. 일기장을 폈을 때 낮에 읽은 시화 중 한 편이 떠올랐다. 그 시의 제목은커녕 기억나는 시행(詩行)도 한 줄 없었다. 다만 시보다 시인이 더 아프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여인은 시를 읽고 시보다 시인에게 더 아픔을 느낀 감정은 처음이었다며 고개까지 끄떡였다. 간밤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오늘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왔다는 여인이 ‘절규’에 다시 눈길을 던졌다.

“여기, 이 구절 때문인가요?”

세 번째 연의 ‘절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묵상 속의 절규’를 가리키자 여인은 당신은 누구냐는 눈길을 던졌다. 그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오지랖이 넓은 노인으로 오해받기에 십상인 말을 건넸다.

“시인의 쾌유를 기도했나요?”

여인은 대답 대신에 한숨을 쉬었다.

“환자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럼 다행이죠. 아! 이 시인을 아시나 봐요?”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왠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여인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환자일지 모른다는 예감에 거짓말했다. ‘절규’ 시의 작가는 잘 아는 시인이었다. 경남의 작은 도시에 사는 그녀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늘 병원과 약봉지를 끼고 사는 자칭 불쌍한 여인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여인도 그녀처럼 몸과 마음 어디가 아프다면, 누군가의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에서 위안을 찾았으면 싶었다. 그녀가 시를 쓰며 늘 새로운 생명력으로 까르르 까르르 웃듯 여인도 그러기를 바랐다.

“시집이 서점에 있겠지요?”

“글쎄요…….”

이번에도 거짓말했다. 지난해 가을에 출간된 네 번째의 시집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이왕지사 시작한 거짓말, 끝까지 고수하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인이 서점을 찾아가는, 그녀의 시집에 더욱 더 관심 두게 하려는 얄팍한 계산의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인에게 작은 일이라도 거기에 빠져들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시집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외출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주문해도 상관없었다. 여인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계속 움직여 아픔을 잊게 하고 싶었다.

걸개 시화가 전시된 바로 맞은편에 단군 동상이 있는 목공예 작업장이 있었다. 전통 장승에 여러 마리의 솟대가 날고 있는 화단과 분수대, 그리고 조그만 연못의 연꽃이 등산객의 발길을 잡았다. 꽃밭 사이사이에 놓인 나무의자로 여인이 다가갔다.

“초등학교 동창 부인 이야기인데요.”

여인은 나무의자에 앉지 않았다.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동창은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려고 귀촌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도시에 있을 때보다 좋아지는 듯했던 아내의 기관지 지병이 악화되면서 급기야 바깥나들이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조그만 걸어도 숨이 찬 아내는 결국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불안 증세까지 보였다. 병원 치료에도 날로 악화되는 지병에 절망하던 아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서 상도 받았다고 자랑한 아내의 일상은 시 쓰기로 채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창은 처음에는 다행이다 싶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걱정으로 바뀌었다. 시 창작의 스트레스가 지병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아 불안했다. 결국, 동창은 조심스럽게 그만둘 것을 부탁했다.아내는 죽기 전에 시인으로 등단하겠다는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뒤늦게 젊은 날의 꿈을 키우는 집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동창은 어느 날 아내의 미소에 오히려 당황했다. 시 한 편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지병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에 놀랐다. 시가 무엇이라고 저렇게 행복한 표정일까. 놀라움과 의아스러움을 감춘 채 지켜보았다.

그렇게 봄이 지나갔다.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여름도 지나 추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문예 계간지의 발행인과 주고받은 이메일 하나를 보여준 아내가 숨이 찬 목소리로 자랑했다.

“여보! 당신 아내가 시인되면 뭐 해줄 건데?”

“시인……?”

동창은 아내의 시가 발행인의 시평(詩評)처럼 등단할 수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이메일의 시평을 직접 읽으면서 착잡했다. 아내는 그동안 시인이 되기 위한 집념으로 지병의 고통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를 한 편, 한 편 쓰며 전화 통화조차 할 수 없는 숨이 찬 아픔을 이겨냈다. 그런 아내가 마침내 시인이 된다면……그다음은…….

동창은 아내의 재촉에 첫 시집을 내주겠다고 약속한 그 날 발행인에게 간곡한 요청의 이메일을 보냈다. 아내는 난치병을 앓고 있다. 그 죽음의 무게를 견뎌내는 것은 시인이 되겠다는 집념이 있어 가능하다. 그런 아내에게 시인 등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 도전이다. 지금처럼 시인이 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집념으로 난치병과 끝까지 맞설 수 있게 도와달라며 등단 보류를 부탁했다.

“그 부인은 아직 등단하지 못했겠군요?”

여인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여인은 대답 없이 기대고 있던 의자에 앉았다. 들고 있던 작은 물병의 물로 목을 축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무엇인가에 만족한, 그것에 감사드리는 고마움의 미소였다.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요. 발행인도 그렇고요.”

남편의 간곡한 요청에 감동한 발행인은 묘안을 짜냈다. 신인으로서의 기대는 충분하지만, 시마다 시상의 세계가 조금씩 아쉽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꼭 2%씩 부족하다. 그 부분만 채운다면 당신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될 것이다. 등단은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받는 시인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습작 시간을 조금만 더 갖자고 제안했다.

부인은 그 말을 온전하게 믿고 받아들였다. 부인은 그해 하반기의 신인상 시 부문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발행인은 그 사실을 숨긴 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유도했다. 한마디로 신인상 수상자 결정을 숨긴 채 거짓말로 시간 끌기 묘수를 펼쳤다.

“저 시인……내 동창 아내처럼 많이 아프죠?”

계속 모른다고 거짓말할 수 없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당신도 아픈 게 맞는다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조금은 못마땅한 미소를 지으며 타박했다.

“그까짓 작은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하세요?”

여인은 처음부터 시인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며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사진만은 제대로 찍어 달라며 걸개 시화 앞에 섰다. ‘절규’ 시를 읽는 여인의 얼굴이 휴대폰 안으로 가득 날아들었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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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