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연녹색의 쑥 앞에 쪼그려 앉았다.

꽃샘추위가 며칠 동안 기승떨었지만, 쑥은 얼어 죽지 않고 오히려 새싹을 더 많이 틔웠다. 햇살이 그대로 투과되는 어린잎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손가락의 냄새를 맡았다. 새싹에서 묻은 쑥 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도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싸움깨나 했을 거야.”그는 어린 쑥 잎을 뜯어 입에 넣었다.

“그래도 애는 낳았겠지……?”

그는 쑥 잎을 씹지 않았다. 입술로 문 채 고개를 끄떡였다.

일본 오사카의 친구 집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다가 돌아온 며칠 전이었다. 결혼 후 전화 통화 한번 없었던 그에게서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누구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나도 너처럼 이혼했다는 문자 끝에 그냥 얼굴이나 좀 보자고 했다. 장소는 옛날 그 찻집이라고만 했다. 언제 몇 시라는 약속 시각은 빠져 있었다.

문자를 보는 순간 쿡 웃음이 터졌다.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유효한 묵계로 믿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결혼 전, 그러니까 6년 전 우리는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 시경 혜화동의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그날 꼭 만나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연극을 보거나 술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어떤 날은 찻집에서 곧바로 헤어지면서도 체면에 걸린 듯 두 사람 다 그 묵계를 지켰다.

문자를 받은 그 날부터 금요일이 기다려졌다. 나도 너처럼 이혼했다는 문자가 그날을 더 기다리게 했다. 그는 그냥 얼굴이나 좀 보자고 했지만, 그게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잘 지내지?”

옛날에는 히죽 웃거나 “왔어!”라며 앞자리에 앉았던 그가 배면이 깔린 인사를, 그것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 말 속에는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으냐는 배려가 숨어 있었다. 너는? 되물으려다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옛날로 돌아온 건가?”

그는 악수하며 고개만 끄떡였다.

“그럼 오늘은 뭐할까? 연극? 아니면 술?”

그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옛날처럼 연꽃잎 차를 시켰다. 두 번, 세 번 우려내도 연한 향기가 남아 있어 정이 간다는 그의 예찬론이 기억나 물었다.

“여전하네? 그 차 좋아하는 거.”

“아니. 그냥 옛날이 생각나서.”

오랜만의 만남 때문일까. 반가우면서도 서먹서먹했다. 만나자는 문자를 받은 후 제일 궁금한 것이 그의 이혼이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대하자 노골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입안에서는 뱅뱅 도는데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내 이혼부터 먼저 털어놓은 후 넌 어떻게 된 거야, 물으려다가 포기했다. 오늘은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로 하며 눈길을 마주했다.

그는 하얀 찻잔의 찻물이 줄어드는 만큼 채워주며 지그시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그러나 무엇인가 숨긴 잔잔한 미소였다.

“너도 그랬어? 그래서 이혼한 거야?”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쥘 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앞뒤 설명 없는 질문에 쳐다보기만 하자 살을 붙였다. 아주 짧게.

“부부, 그게 부담스러웠니? 너도?”

그는 도자기 주전자를 들어 보이며 뜨거운 물을 더 청했다. 찻집 여인이 눈치 빠르게 새 주전자를 가져오자 연꽃잎 차에 아주 천천히, 조금씩 물을 부었다.

“전업주부,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여자였어.”

오로지 가정에만 충실하겠다고 직장까지 그만둔 아내가 결혼 반년도 안 돼 이혼하자는데 할 말이 없더라. 그래서 헤어졌어. 아내였던 그녀가 이혼해줘서 고맙다며 이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데 정말 황당했어. 부부에게, 가정의 가장 소중한 꿈이 오히려 이혼 사유가 된 황당한 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녀의 물건들이, 빈 화장품 병 하나 남기지 않고 빠져나간 날 아파트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동산중개소에 아파트를 내놓는 거였어.”

다행히 아파트가 빨리 팔려 이사했다는 그가 삼 년 전 일이라며 한숨을 삼켰다. 고개 숙인 채 차를 조금씩 마시다가 쳐다보며 보일 듯 말듯 짓는 미소에서 아픔이 묻어났다. 나도 이혼했다는 문자에서 상흔이 남아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지난날의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허리가 뚝 꺾인 꽃봉오리 줄기를 스카치테이프로 묶어 페트병에 꽂으며 꽃이 활짝 필 거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팔짱을 꼈다가 풀거나 깍지 낀 손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말문을 닫았던 그가 이혼한 아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아내가 한 말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곤혹스러워하는 그가 속 시원히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듣기만 했다.

“아내 자리가 싫다고 했어.”

그의 눈길을 마주 보았다.

“자식 낳는 것도 싫고.”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떠난다니 그게 말이 돼?”

부부가 별거냐. 남편과 아내로 서로 위하면서 자식 낳고 티격태격 다투며 사는 게 아니냐. 더구나 현모양처를 꿈꾸던 사람이 정반대의 이유로 헤어지자고 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그가 부부, 그게 부담스러워 이혼했느냐고 물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부 되는 게 부담스러우면 어떻게 결혼해? 되물으려다가 남편이 내세운 이혼 이유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다섯 살 더 많은 남편은 괜찮은 남자였다. 혼기의 여성들이 고개 젓는 장남도, 추남도 아니었다. 중소기업체의 월급쟁이라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언니의 소개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결혼식을 올렸다.

삼십 전에 둘, 넘어서 한 놈 이렇게 이년 터울로 셋을 낳겠다고 하자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부터 지었다. 셋이 많으면 둘까지는 양보하겠지만, 하나는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날 밤 남편은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뜨거운 부부였다.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나 사 년이 돼도 아이가 없자 초조해졌다. 남편은 함께 검진을 받자는 말에 찬성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뤄 또 일 년이 지나갔다.

부부싸움의 발단은 병원 검진을 피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결국 이혼으로 끝이 났다. 남편은 이미 결혼 전에 아이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병원 검진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무중력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현기증에 휩싸였다.

-난 아빠 노릇 할 자신 없어. 그래서 포기했어.

남편은 주저 없이 이혼을 선언했다. 결혼 전에 금수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다고 정관을 자른 남편은 이해 불가의 남자였다. 결혼 반년 만에 아내의 자리와 임신이 싫다고 이혼을 요구한 그녀 역시 이해 불가 여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무조건 무책임한 인간으로 매도하며 분노의 시간만 보낼 수 없었다.

“눈 좀 떠봐.”

두 번째 재촉에 눈을 뜬 그가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내 얘기는 듣지 않고.”

“다 들었어.”

“그래?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이미 떠난 사람들인데 가타부타 따져서 뭐할 거냐며 화장실을 다녀오자 그가 자리에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싶어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주 일요일, 청계산으로 쑥 냄새 맡으러 가자는 문자 시각에 정확히 나타났다.

그는 입술로 자근자근 물던 쑥 잎을 뱉더니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참 동안 발끝을, 구름을 쳐다보거나 아예 눈 감고 있다가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함께 살자고 했다. 아이도 서넛 낳자며 우리는 지금부터 부부라고 못 박았다.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구구 구구구 울었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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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