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기가 찼다.

문자 내용은 아내가 남편에게 일요일 오후 어디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혹시 하는 기대로 단골손님에게 보여주자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주말부부냐며 아내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지 잘 생각해보란다.

처음에는 잘못 보내온 문자로 무시했다. 그런데 휴대폰이 진동할 때마다 그녀의 전화가 아닐까 서둘러 받으면서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잘못 왔거나 장난 문자이든 상관없이 그녀가 지정한 장소에 나가려고 일요일의 바다낚시도 취소했다.

목련이 터지고, 벚꽃이 뽀얗게 날리는 사월인데 꽃샘추위로 손이 시렸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찾는 인사동이었다. 충무로 영화의 거리에 탁자 네 개짜리 커피숍을 차린 후 일요일에는 친구들과 등산하거나 낚시하기 바빠 인사동의 한가로운 순례는 추억 속의 낭만이었다.

해태 석물이 놓인 골동품점포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3분 전이었다. 문자를 보낸 여자는 정각에 나타날 모양이다 싶어 윈도의 골동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점포 안에서 여자가 나왔다.

“그 물건들…….”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물건들은 옛날 무덤에서 나온 건데 무섭지 않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커피숍 단골손님이었던 여자였다. 그녀는 이삼일 간격으로 커피숍에 들러 매번 주문을 다르게 했다. 들리는 시간도 대중없었다. 오전 일찍 오는가 하면 직장인들의 퇴근 무렵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녀는 늘 혼자 와서 커피를 음미하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 짓곤 했었다.

“지금부터 제 포로예요.”

그녀는 문자를 보낸 당사자임을 밝히지 않고 스스럼없이 팔짱 끼며 어깨에 머리까지 기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에게 홀린 듯 걸어가며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비록 단골손님이었지만, 팔짱을 낄 만큼 친숙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사귀자는 눈길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몇 개월 단골손님이었던 여자일 뿐이었다.

“인사동에 오면 술맛 난다고 했죠?”

키가 한 뼘 이상 작은 그녀가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으려다 고개를 끄떡였다. 팔짱을 끼고 인사동 거리를 걷는 어색함보다 마주 앉아 술 한잔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간 곳은 주점이 아니라 갤러리였다.

“개인전보다 합동전이 더 좋아요.”

그녀는 수준 이하의 개인전은 실망하면서도 곧바로 돌아서지 못해 곤혹스럽지만, 합동전은 아니라고 했다. 여러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오히려 수준에 못 미치는 작품도 정겹다고 했다. 아마 다양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만족감에 그럴 수도 있다는 이해의 배려일 거라며 웃었다.

여류화가 5인전이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이었다. 풍경화이든 추상화이든 마음에 들면 그것이 좋은 그림인 내게 그녀는 다행히 감상 소감을 묻지 않았다. 자신의 느낌도 들려주지 않았다. 조용히, 차분하게 작품을 감상하며 자리를 옮겼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슬그머니 풀려고 했던 팔짱을 그녀는 끝까지 고수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도 풀어주지 않았다.

“우리 서예전도 봐요.”

전통 한옥과 3층 건물의 미술관 마당으로 들어서자 한방차 향기가 은은하게 감겨왔다. 그녀는 차향에 관심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서예전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채 꼼짝없이 끌려 들어간 서예전은 한자의 행서와 초서전이었다. 흘림체의 초서 앞에서는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면서도 붓끝의 흐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읽거나 해석을 못 하지만, 붓과 먹물이 만들어낸 초서는 경이로운 예술 세계였다.

“초서 앞에서는 언제나 숨이 막혀요.”

당신도 서예가? 라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초서의 붓 흐름은 정말 부드러워요. 그러면서도 강한 힘이 넘치고.”

외유내강으로는 표현이 부족하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려 그녀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그녀는 단순히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보자고 일 년 전의 단골 커피숍 남자를 불러낼 리 없었다. 이유가 있을 텐데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초서에 빠진 그녀에게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귓속말을 하자 마지못해 돌아섰다.

“불러낸 이유가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요.”

미술관을 벗어나자 그녀가 내 속마음을 알아챈 듯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솜사탕을 가리켰다.

“우리 저거 먹어요.”

그녀는 하나만 샀다.

“전 혼자가 참 편해요.”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번 돈으로 혼자 사는 게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그녀가 뜬금없이 사과했다.

“무엇이든 혼자 하니까 솜사탕도 하나만 샀네요.”

그녀는 솜사탕을 먼저 먹으라며 입에 대주었다. 여자와 팔짱을 끼고 인파 속에서 솜사탕을 먹는다는 게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재촉에 한 입 살짝 물었지만, 재빨리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에게 솜사탕을 먹여준 거 처음이에요.”

혼자 사는, 남자 친구가 없는 여자. 삼십 대 초반이라는 짐작 외에 그녀에 대해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다낚시까지 취소하면서 양복바지에다 하얀 와이셔츠와 엷은 회색 사파리 재킷을 입고 나온 것은 문자의 여자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평상시에는 낡은 청바지와 허름한 티셔츠, 철 따라 걸치는 유행 지난 점퍼 차림이었다.

“오늘은 못 보던 모습이라 깜짝 놀랐어요.”

그녀는 매력적이고 멋지다. 그러나 바리스타의 모습은 아니라며 다시 솜사탕을 물려주었다. 처음이 민망했지, 이제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먹은 후 그녀의 입가로 밀어주었다. 우리는 인사동으로 데이트 나온 영락없는 연인이거나 신혼부부라고 하자 그녀가 쿡쿡 웃었다.

“어떻게 하죠? 저는 남편이 있는데.”

남편의 직업도 당신처럼 바리스타라며 커피숍이 충무로에 있다고 했다. 충무로에는 한 집 건너라 할 만큼 널린 게 커피숍이었다. 순간적으로 어느 숍일까, 몇 곳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남편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의 팔짱을 끼고 인사동을 활보할 리 없었다.

“저 정말 남편 있는 여자예요.”

그녀는 내가 믿지 않자 남편 있는 여자임을 강조하며 표구점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여자는 팔짱을 풀었다. 표구점 여주인은 스케치북 크기의 예쁘게 포장한 상자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신랑이랑 같이 왔네요. 그림보다 실물이 더 멋져요.”

“정말요?”

“그럼요. 질투 나요.”

두 여자의 맞장구 대화에 기가 찼지만, 그냥 신랑처럼 서 있었다. 여주인의 그림보다 실물이 더 멋지다는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상자 속의 표구는 내 얼굴을 그린 그림이 확실했다. 그녀가 직접 그렸거나 몰래 찍은 얼굴 사진을 컴퓨터를 이용해 그림으로 바꿔 표구한 게 분명했다.

표구점을 나와 지하철 출입구까지 오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술 데이트도 하고 싶었는데…….”

술 취하면 큰일 저지를 것 같아 추억 만들기 데이트는 여기까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제가 그린, 커피숍에서 일하는 당신 모습이에요.”

허락 없이 남편으로 삼아서 미안하다며 표구 상자를 내밀었다. 혼자 사는 여자이지만, 상상의 남편은 있어야 할 것 같아 당신을 택했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바라보기만 하자 다시 고개를 숙인 그녀가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갔지만,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꽃샘추위 속의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끝없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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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