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을 모친으로부터 닦아온 다양한 춤의 역량, 우리 춤 계보전승의 맥을 이어가며 시대의 춤꾼으로 한국무용계의 보배...‘환경에 휘둘려서 안주하지 말라’

[골프타임즈=윤상길 칼럼니스트] 잘 차려진 밥상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여기에 맛까지 더해졌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전통예술국제교류원이 마련한 ‘양정화·박상희의 모녀춤판’(11월 16일,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 오른 여섯 편의 작품-‘승무, 한량무, 교방 축원무, 부채춤, 살풀이, 진도북놀이’는 한 밥상에 모아 놓고 보니 정중동(靜中動)으로 짜인 개개의 맛깔이 빚어내는 조화의 묘미가 만만치 않았다. 내공 탄탄한 무용가가 아니고서는 결코 연출해낼 수 없는 잔치상이었다.

프로그램의 압권은 프로그램의 제목이 그대로 드러난 ‘살풀이’가 아닐 수 없다. 한국무용계의 거목 양정화 선생(82)이 그의 제자이자 친딸인 박상희(49·전통예술국제교류원 이사장)와 펼쳐 보인 ‘모녀춤판’의 ‘살풀이’는, 요즘 자주 쓰이는 모녀지간의 ‘콜라보’ 작품이어서 그 감흥은 배가되었다.

무대에 선 양정화 선생에게 ‘팔순을 넘긴 생물학적 나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선생의 춤사위는 여전했다. 멈춰있고 또 멈춘듯 한데 그 안에 움직임이 감지됐다. 고요한 가운데 무게감 있는 ‘살풀이’, ‘정중동’의 매력 그 자체였다. 현란한 몸짓이나 화려한 기교는 배제되었다. 다만 손끝에 ‘맛’을 담고, 발끝에 ‘멋’을 얹었을 뿐이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 양정화 선생이었다.

박상희 이사장은 그런 어머니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무대를 감싸는 그림자 역할에 충실했다. 어머니를 위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그대로, 넘어지면서 배우고, 무섭지만 도전해온 자신을 확인하는 자세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양정화 선생이 한국무용계의 주춧돌이라면 딸 박상희 이사장은 대들보이다. 대학(경희대 무용학과)을 졸업하고,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의 교수를 지내기까지 올곧게 한국무용의 외길을 걸어온 박 이사장이다. 세종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을 지낸 강신구 전통예술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40여년을 모친으로부터 닦아온 춤과 다양한 춤 세계의 역량으로 유감없이 우리춤 계보전승의 맥을 굳건히 이어가며 시대의 춤꾼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한국무용계의 보배”이다.

박 이사장은 이제 자신이 어머니를 대신해 후진 양성에 나설 때가 되었음을 이번 공연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된다. 건강하시려면 춤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춤판을 마련했고, 이 ‘모녀춤판’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효심을 드러냈다. 단지 춤 욕심쟁이인 어머니가 쉬엄쉬엄 하셨으면 하는 생각이다. 아직도 무용연습실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서이다. 후진 양성에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이유이다.

한국무용계는 외형상으로 정체 상태다. 중고교의 무용반이 줄고 있고, 진짜 춤꾼의 산실이어야 하는 대학에서는 무용전공학과가 폐지되고 있다. 자연히 개인이 운영해오는 무용학원이나 연습실도 줄어들고, 이는 무용인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상황의 심각성을 박 이사장은 무료 교육을 통한 무용 인구 확대로 타개하려 하고 있다. 수원시에 대규모 연습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초등학생부터 6,70대 노년에 이르기까지 무용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누구나 무료로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고, 연습실도 무료 개방하고 있다.

무료교육을 통해 박 이사장은 그동안 귓등으로 흘렸던, 평범하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교훈이다. 그는 요즘 즐거움 하나로 한국무용을 배우고, 멋진 율동을 만들어내는 교육생들이 마냥 사랑스럽다. 그의 표현대로 교육 현장에서 만난 교육생들은 나이 성별 직업 등 각양각색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무용을 즐기는’사람들이었다.

교육 확산을 통해 박 이사장은 새로운 춤꾼의 탄생을 기대한다. 또한 한국무용하면 떠오르는 형식적인 틀, 지역에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보여줄 예정이다. 한국무용이라는 전문성 위에 ‘재미있고 유쾌한 춤’이라는 대중성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융합한 한국무용계의 가치 확장에 주목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우리 중견 무용가들에게는 기초 춤사위부터 복식·의물·공연 기록물 등을 후대에 바르게 계승하여 한국무용의 오랜 전통을 지켜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라고 강조한다. ‘지금-여기’의 가치를 넘어 단절되었던 지난 세기의 전통을 바로 잡고 올바른 정체성을 세워 다음 세대에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모녀춤판’에 이어 오는 12월 4일 일본 황실 초청 도쿄 공연으로 올해 활동을 마무리 하는 한국무용가 박상희. 그는 지난 40여년의 수련과 공연에서 체험한 경험들을 모아 다시 2018년 새해를 향해 가만히 호흡을 고르고 있다. 전국의 사찰을 다니고, 해외 곳곳을 누비던 경험이 지금의 그의 몸짓에서 은연중에 묻어나고 있는 것처럼, 무대 위에서 보이는 모습보다 ‘마음가짐’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기 넘치는 이 중견 무용가의 건재함이 증명될 수 있을 듯하다.

“환경에 휘둘려서 안주하지 말라”는 스승인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한 중견무용가 박상희의 이같은 바람은 아마 ‘모녀춤판’의 어머니처럼 70~80대가 되어 마침내 무르익을 한국무용 대가의 건재함으로 입증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상길 컬럼니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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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윤상길은
부산일보ㆍ국민일보 기자, 시사저널 기획위원을 역임하고 스포츠투데이 편집위원으로 있다. 장군의 딸들, 질투, 청개구리합창 등 소설과 희곡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