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지루한 장마였다.

선영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투명한 우의를 입었다. 흰 장화를 신은 후 우산도 챙겼다. 오랜만에 빗속을 걸어보자는 그의 전화에 첫 데이트처럼 가슴이 뛰었다.

중앙공원의 야외음악당까지는 아파트에서 십분 거리였다.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여유 있었지만, 일찍 나선 것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어렸을 때는 비가 그치면 우산을 들고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뚝 뚝 떨어지는 낙수를 비닐우산으로 받으며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참 별난 아이라고 놀리곤 했었다.

굵었던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우산을 때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가로수 밑을 지날 때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에 흠칫 놀랐다. 마치 우산 없이 가로수 빗물을 흠뻑 뒤집어쓰는 착각에 진저리쳤다.

야외음악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숲길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 안 왔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약속 시각에 임박해서 헐레벌떡 뛰어올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공원 숲길을 천천히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우의를 통해 전해져오는 비 젖은 벤치의 차가움에 온몸이 움츠려들었다.

-결혼하자.

한 달 전이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장맛비는 아니었지만, 빗줄기가 굵었다. 우산 하나로 비를 피하며 걷던 그가 불쑥 말했다.

-연애는 할 만큼 했다.

결혼하자, 연애는 할 만큼 했다는 그의 무뚝뚝한 말이 빗소리에 뒤섞여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고 걷기만 하자 그가 말했다.

-애는 서너쯤 낳자.

애당초 그에게 멋진 프러포즈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서운했다. 자꾸만 이게 아니라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여타 여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쿡쿡 웃었다. 이 웃음을 그는 결혼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결혼식은 멋지게 하자.

그날 그는 전에 없이 많은 말을 했다. 아예 이게 바로 멋진 부부 인생이다, 라는 전제로 시작한 이야기는 잠자리까지 이어졌다. 그날은 나와 그의 아파트가 아닌 호텔에서 밤을 함께 보냈다. 사실 우리는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파트에 내 물건이, 내 아파트에 그의 물건이 있어 누구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다음 날 출근하는데 불편할 게 없었다.

호칭도 어느새 부부처럼 바뀌었다. 오빠라는 말보다 당신이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했다. 그도 선영이라는 이름보다 여보라는 말이 입에 붙어 데이트도 처녀총각이 아닌 신혼부부의 나들이가 됐다.

벤치에서 일어섰다. 휴대폰 시계가 약속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쯤 야외음악당 무대로 들어서다가 곧바로 발길을 돌릴 것이다. 언제나 약속한 장소에 먼저 와 기다리던 연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을 것이다.

지지난해 여름이었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로 놀려갔을 때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모텔 밖에서 두 시간이나 서성이며 기다리다가 파출소에 연인이 행방불명이라고 신고했다. 당시 피서객이 실종된 사건이 있어 파출소는 초긴장이었는데, 오빠의 연인 행방불명 신고는 기름에 불붙인 격이 됐다. 파출소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내가 나타나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그는 다음날 오전까지 입을 닫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 사건 이후 그와 여행할 때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늘 그의 눈 속에 있으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누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행동하기가 귀찮았지만, 익숙해지자 오히려 편했다. 내가 그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늘 곁에서 나를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야외음악당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가 한걸음에 다가왔다. 그는 야외음악당 무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걷자고 했다. 오빠는 비 맞는 거 싫어하잖아, 라면서도 먼저 공원 숲길로 들어섰다.

“이번 주말에 인사드리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내 부모에게? 아니면 내가 당신 부모님께? 어느 쪽이 먼저냐는 눈빛을 던졌다.

“아무래도 선영이 부모님이 먼저겠지?”

“오빠 편한 대로 해.”

“우리 집에서는 선영이, 너를 이미 며느리로 승낙했어.”

며느리로 승낙했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를? 웃긴다. 당신 부모님 혹시 며느리 될 여자에게 아예 관심조차 없는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아들의 말만 믿고 승낙해. 최소한 얼굴이라도 본 후 승낙해야 시부모로서의 위엄이 설 텐데…….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슬그머니 기분이 상했다.

“나 오빠랑 결혼하지 말까봐.”

그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 부모님이 나와의 결혼을 승낙했다고? 그게 언제인데?”

“이 년 전. 요즘은 후딱 혼례 치르자고 성화시다.”

“참! 오빠가 삼대독자지?”

칠십 중반을 훌쩍 넘긴 부모 입장에서는 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서운했다. 아무리 손 잇기가 급하기로 아들 여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결혼부터 승낙하느냐, 따지고 싶었다.

가늘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수백 수 천 개의 북이 한꺼번에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때로는 솔가지가 불에 타는 듯 타닥타닥 소리로 변했다. 자유자재로 소리를 바꾸는 빗줄기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은 금방 젖어 빗물이 흘렀다.

“우리 신혼집 말이야. 어디다가 준비할까?”

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와 내 아파트가 있는데 왜 집을 사? 의아한 표정을 짓자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냥 선영이 아파트에서 살까?”

그는 자기 아파트도 괜찮지 않느냐고 덧붙여 물었다. 신혼집? 우린 이미 각자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또 집을 사? 결혼하자는 그의 청혼에도 신혼집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중순경이지만, 예식장도 알아보지 않았다. 그가 물을 때마다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꼭 예식장에서 해야 해?”

“왜, 예식장이 마땅치 않아?”

“그건 아니고…….”

그가 또 걸음을 멈췄다.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도 신혼집 운운하며 들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인가에 쫒기 듯 초조한 얼굴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확인해야겠어.”

그의 확인이라는 말에 돌아섰다.

“뭘 확인하고 싶은데?”

“요즘 왜 그래?”

그의 요즘 왜 그래, 라는 물음이 무거운 바람으로 안겨왔다. 그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보이지 않는 부담감으로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 침묵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결혼 생각을 안 했던 것도 아닌데 막상 결혼하자는 말에 기쁨보다 숨이 막혔다. 결혼하자는데 왜 숨이 막혀? 너 미쳤니? 자책하다가 애를 서너쯤 낳자는 말에 쿡쿡 웃었다. 애를 서넛 낳자는 말에 어이가 없어 터진 웃음이었지만, 차마 난 애 안 낳을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와의 잠자리가 불편했다.

“선영아!”

그가 전에 없이 심각한 목소리로 불렀다.

“결혼하자는 거 무리였니? 그런 거야?”

재빨리,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결혼해야 하는 거 맞아.”

“그런데 왜 그래? 무엇이 문제야?”

무엇이 문제냐고?

그걸 나도 모르겠어. 우린 벌써 결혼식을 올렸어야 했는데 왜 생소한 일처럼 느껴지지.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어. 다만 우리는 이미 부부가 아닌가? 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만 자꾸 부각되는 거야. 뭐랄까? 우리가 부부로 인정하며 살면 됐지. 이를 세상에 알리려고 혼례식을 치려야 한다는 게 번거롭고 성가신 절차로 느껴졌다.

“결혼식 있잖아. 그거 하긴 하는데 부탁이 있어.”

“부탁?”

“오빠! 우리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살자. 애 낳는 건 좀 더 생각하고.”

비가 그쳤다. 우산을 접던 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외면했다. 비 그친 하늘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다가섰다. 얼굴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끌어안았다.

“선영아! 결혼하면 한 집에서 사는 거야. 그게 부부야.”

그의 가슴은 언제나 따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커다란 바위 덩어리 같았다.

“부부? 그거 별거 아니야. 자식새끼 낳아 기르며 티격태격 타투면서 늙는 게 부부야.”

그가 등을 토닥이며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서 벗어나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승낙을 받아내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불안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지금의 이대로가 좋아. 그러니까 결혼해도 우리 따로따로 살자.”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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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