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 4千字 소설 제3화] 네 여자로 남고 싶어

미소 속으로 눈물 스미는 그녀의 목소리 정병국 작가l승인2017.06.20l수정2017.06.20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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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뜻밖의 해후였다.

그녀와는 그냥 아는 사이였다. 단 둘이 술을 마신 적도 없었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없는 말 그대로 무덤덤한 관계의 친구였다. 그런 그녀와 여동생의 상견례 자리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서로 눈인사를 양가 모르게 살짝 주고받았을 뿐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눌 자리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럴 기회도 없었다.

상견례 후 일주일이 채 못 돼 그녀가 전화했다.

“나야. 혜련이.”

또 잊고 있었다. 그녀가 상견례 때보니까 많이 말랐더라.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됐다는 말에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그래. 그때 우리 몇 년 만에 본 거지? 아마…….”

그녀가 말을 끊었다.

“몇 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네가 언제 날 아는 척이라도 했니?”

“그랬나?”

“시끄럽고……. 빨리 이쪽으로 와.”

그녀는 거절할 사이 없이 전화를 끊었다. 선약이 있어 못 간다고 전화하려 할 때 문자가 날아들었다. 오늘은 무조건 내 말 들어주라. 옛날처럼 남의 떡 대하듯 하지 말고 좀 살갑게 굴어라. 곧 사돈처녀, 사돈총각 될 사이 아니냐.

어쩔 수 없이 선약을 깨고 그녀가 알려준 카페를 찾아갔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라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거. 그녀는 이미 내 직장 위치를 알고 적당히 떨어진 카페에서 퇴근할 무렵 전화했다는 확신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 혜련이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사돈처녀! 혼술하다가 슬펐나 보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고 인사하면 안 돼?”

“미안! 그건 그렇고, 웬 일이야? 날 다 찾아오고.”

“꼭 그렇게 말해야 해?”

그녀는 빤히 쳐다보다가 술잔을 내밀었다. 술 따르는 손길이 희고 길었다. 손톱에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긴 손가락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붉은색 매니큐어의 점 하나 찍히지 않은 손톱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수국을 떠올렸다. 활짝 핀 수국 꽃잎을 하나씩 붙여놓은 듯했다.

어렸을 때였다. 울안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수국 몇 그루가 봄마다 꽃을 피웠다. 수국이 피면 꽃잎을 따 손톱마다 침으로 붙이다가 큰누나에게 혼나곤 했었다. 어린 눈에도 하얀 수국 꽃잎이 예뻤던 모양이었다.

“사내 녀석이 뭐 하는 짓이야?”

“예쁘잖아.”

“너 고추 떨어진다.”

“고추?”

큰누나는 짓궂었다. 반바지를 내려 고추를 톡 건드렸다. 누나의 장난보다 고추 떨어진다는 말에 깜짝 놀라 재빨리 꽃잎을 털어냈던 추억에 빙그레 웃자 그녀가 물었다.

“왜 웃어?”

“그러니까……우리가 정말 사돈이 되는 거 맞지?”

어릴 적 추억을 들려주려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너의 긴 손가락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손톱이 예뻐 어린 시절의 고추 추억이 떠올랐다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그녀의 요구대로 살갑게 대하려면 긴 손가락과 하얀 손톱이 정말 섹시하다며 만지작거려야 했다.

“말하기 싫구나. 여전히.”

“지금 잘하는 거 아닌가?”

“하긴 옛날보다는 낫다. 단둘이 술도 마시고, 투덜투덜 따지고.”

혜련이를 언제 만났던가, 더듬어 보았다. 학연도, 지연도 아닌 그녀를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소개받았는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단체 미팅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던지, 아니면 친구의 친구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대학 졸업 때까지 이런저런 자리에서의 만남이 이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우리 인연, 참 끈질기다. 이러다가 저승까지 함께 가겠다.”

그녀가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인연이라고? 우리가?

“넌 내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야.”

그녀가 술잔을 한 모금에 비웠다.

“우리 인연이 어디까지 갈까?”

그녀가 빈 잔 두 개에 술을 가득 따랐다.

“건배하자. 우리의 재미없는 재회를 위해서.”

그녀는 내가 술잔을 들지 않자 피식 웃으며 잔을 비웠다.

“이건 뭐지? 무시? 무관심? 아니면 뭐가 또 있니?”

“아무것도 없어. 그냥 편하게 마시자.”

“그래? 그러지 뭐.”

그녀는 헤어질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치 옛날의 무관심을 복수라도 하듯 택시를 잡더니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않고 사라졌다.

여동생의 결혼식 날이 잡히면서 모든 준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여동생은 야외 결혼 사진을 여유롭게 찍을 거라면서도 결혼식 2주 전부터 법석 떨었다. 차를 여동생에게 빌려준 금요일 오후, 혜련이가 회사로 찾아왔다. 퇴근 무렵이었다.

서울을 빠져나온 그녀의 차는 경춘 고속도로로 접어들더니 속도를 냈다. 초여름의 저녁 해는 아직 하늘에 걸려 있었다.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린 채 간간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굳이 앞지르지 않아도 될 텐데 앞차 추월을 반복했다. 그랬다가도 속도를 죽여 뒤따르던 차들이 앞지르도록 양보 운전을 했다.

“안 좋은 일 있어? 운전이 왜 그래?”

“내 운전이 어때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달릴 뿐이야.”

그녀의 그냥 달릴 뿐이라는 말에 현재의 이 상황은 폭발 직전의 화산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스쳐갔다. 어쩌면 십 년 가까운 인연인데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관계에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유치한 짐작이지만, 그녀가 나를 짝사랑한 지난 세월이 추억의 시간조차 되지 못한 절망의 분노일는지 모른다. 상견례 자리에서 그녀는 양가 가족 모르게 나를 훔쳐보곤 했다. 그때 그녀의 눈빛에 안개비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부터 상견례 자리가 끝날 때까지 신경 쓰였다.

한 달 후였나. 단둘이 술 마시는 자리에서도 안개비 같은 것이 그녀의 눈빛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척 외면했다. 안개비의 의미에 감동하여 양가를 겹사돈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나일 뿐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그녀는 관심 밖의 여자였다.

“가평휴게소에서 잠시 쉬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곡폭포까지 얼마 안 남았어.”

구곡폭포는 춘천 초입의 강촌에 있었다. 평일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쉼터로 풍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혜련 친구들과 어울려 놀려온 적이 있었다.

“기억 나?”

“기억나지.”

“그럼 됐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다리를 건너 구곡폭포 진입로로 접어들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음식점과 카페, 모텔이 곳곳에 박혀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십 대 초반에 다녀간, 아름다운 풍경의 자연이 아니라 위락 시설로 가득 찬 도시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여기 놀려왔을 때, 그때 말이야.”

모텔 주차장이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네 여자가 되고 싶었어.”

“…….”

“지금도 난 네가 날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거 알아.”

승용차 두 대가 연이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남녀들은 모텔 안으로 사라졌다.

“부탁이야. 오늘은 날 여자로 대해 줘. 그러니까 내 말은…….”

그녀, 혜련이가 차에서 내려 모텔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엷은 미소 속으로 눈물이 스미는 그녀의 목소리가 온몸을 조여 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동생이 결혼하여 사돈지간이 되기 전에 네 여자로 남고 싶어.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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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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