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선글라스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

전철 객실, 맞은편 자리의 아가씨와 자꾸만 눈길이 마주쳐 불편했다. 자는 척 눈을 감았다가 뜨면 번번이 시선이 마주쳐 재빨리 외면했다. 그런 상황이 서너 번 일어나자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 검은 선글라스를 슬그머니 썼다. 인덕원역까지는 반시간 남짓 걸리므로 잠을 청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선글라스를 벗자 또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차가운 표정과 눈초리에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저 여자가 왜 그러지? 전철 객실에서 마주 앉은 승객끼리 눈길 마주치는 건 예사 아닌가. 적당히 외면하면 그만인데 참 별일이다 싶어 사당역에서 내렸다. 노출이 심한 그녀의 몸 곳곳을 뚫어지게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자칫 성범죄 어쩌고저쩌고 시빗거리가 될 듯싶어서였다.

전철 객실에서 일어난 성범죄는 심각한 것도 있지만, 웃지 못 할 넨 센스도 많았다. 휴대폰으로 장난삼아 자기 얼굴을 슬금슬금 찍었는데 맞은편 아가씨의 신고로 조사받은 성실한 청년.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은 여자의 신고로 곤혹을 치른 서 있던 승객, 중년신사의 해프닝. 두 손에 물건을 들었는데도 엉덩이를 만졌다고 따귀 맞은 지하철 킥 아저씨. 그동안 이런저런 자리에서 들었던 성범죄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도망친다고 일이 해결될까?”

친구에게 전화하러 휴대폰을 꺼낼 때 칼칼한 여자의 목소리가 얼굴을 때렸다. 그녀였다. 구두코가 내 구두에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서자 옆으로 옮겨 앉았다.

“사과해.”

무엇을 사과하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네가 뭔데 앞뒤 설명 없이 사과하라고 하느냐. 어디 그 얼굴 좀 보자. 고개를 들자 두 다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젖히자 배꼽 위의 가슴이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예 의자 뒷벽에 기대며 고개를 젖히자 그때야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할 건데? 여자 몸 훔쳐봤으면 사과해야지.”

“훔쳐보다니……내가 그쪽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객실에서 눈길 몇 번 마주친 것을 빌미로 성범죄자로 몰고 있었다. 대답 한 번 잘못했다가는 파렴치한 성범죄자로 추락하여 추한 꼴이 되겠다 싶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글라스까지 끼고 여자 몸을 훑어봐? 그것도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고개 한 번 안 돌렸다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오해하고 있었다. 자꾸만 눈길이 마주치자 불편해서 선글라스를 낀 후 오수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선글라스로 음탕한 눈길을 감추고 자신의 노출 부위를 감상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난 잤어요.”

“그 말을 믿어라?”

“그래요. 공연히 생트집 잡지 말아요.”

생트집이라는 말에 여자가 발끈했다. 조금 전까지는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크게 화가 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적당히 사과하면 돌아설 기미를 드러냈었다. 그러나 생트집이라는 한 마디가 그녀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내심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그녀는 팔등신 몸매였다. 얼굴도 뛰어난 미색이었고, 묶은 긴 머리카락이 말 그대로 준마의 기름진 꼬리였다. 억지 말만 빼면 볼수록 가슴으로 파고드는 매혹의 여자였다. 이건 아니다 싶을 만큼 심한 노출 패션이 묘한 성적 충동을 일으켰다. 전에 없었던 욕망에 서둘러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딜 도망쳐?”

그녀가 잽싸게 따라붙으며 팔을 잡았다.

“갑시다. 술 한잔하면서 따져봅시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만을 이용해 전철역 밖으로 나왔다. 해 떨어지기 직전의 밖은 여전히 더운 열기로 가득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평소 다니던 술집으로 들어가 출입문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난 빨간 소주.”

그녀가 끼어들며 노려보았다. 술을 산다고 했으면 이쪽 의사가 먼저 아니냐는 눈초리이었다.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 항의는 인정하마. 이쪽에서 먼저 한잔하자고 했으니 적어도 무슨 술은 마실 것인지 물어봤어야 했다. 작은 실수였지만, 미안한 눈길을 던지면서 맥주를 취소했다.

“헐! 인간다워지겠다? 변태 주제에.”

전철 객실에서는 성폭력범으로 몰아가더니 지금은 변태라고 뒤집어씌웠다. 어떤 술을 마실 것인지 묻지 않았다고 변태로 보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관음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여자의 입에서 관음증 환자라는 말도 쉽게 나올 것 같았다.

“성폭력범에 변태인 남자와 술 마시는 거 겁 안 나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장난치지 말고 사과부터 해. 술맛 나게.”

“난 그쪽을 훔쳐보지 않았어요.”

“사과하라니까. 빨리!”

“난 그쪽 몸을 훔쳐보지 않았다고요.”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유치하지만, 내가 당신의 몸을 훔쳐봤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려다가 삼켰다. 철부지처럼 반말만 하는 여자에게 증거 운운해봤자 기분만 더 잡칠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사과를 요구하면 댁이 하도 육감적이라서 선글라스를 끼고 훔쳐봤다. 미안하다. 이것도 인연이니 술이나 기분 좋게 마시자. 라고 말하려 할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과하기 싫다? 좋아. 내가 알아서 처벌할게.”

“……?”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변태에게 베푸는 꿀떡이니까.”

변태에게 베푸는 꿀떡이라? 거친 말투가 갑자기 나긋해졌다. 이 여자가 웬 변덕이지? 꿀떡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미끼로 무슨 흉계를 꾸미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반쯤 남은 잔은 천천히 비웠다. 지나친 노출 패션에 고약한 말투지만, 질 나쁜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인간의 속성 아닌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웃겨. 그 머리로 백 년 굴려봤자 답 없어. 그냥 주는 떡이나 냉큼 받아먹어.”

그녀는 두 개의 빈 잔에 술을 찰랑거리게 채웠다.

“마셔!”

그녀는 내가 잔을 들기도 전에 한 모금에 비우고 다시 채웠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안 마셔?”

그녀의 독촉에 잔을 들었지만,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씩, 묘하게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잔을 내려놓았다. 자칫 취했다가 그녀의 흉계에 넘어가 난감한 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적당히 술자리를 끝내기로 했다.

“안 잡아먹어. 곱게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셔.”

그녀가 잔을 집어 내밀었다. 할 수 없이 받아 마시는 척만 하고 내려놓자 그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서너 살 사내아이의 엉뚱한 짓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과 웃음이었다.

“내가 무서워?”

고개를 끄떡였다.

“하늘땅만큼?”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됐어. 넌 지금부터 내 거야. 내꺼!”

이번에는 내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기 몸을 훔쳐봤다고 변태라 몰아세웠던 남자를,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남자를 자기 것이라고 선언한 그녀도 웃었다. 술기운이 상당히 오른 그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선글라스 내놔.”

티셔츠 주머니에 있는 선글라스를 건네주자 곧바로 썼다가 이마 위로 올렸다.

“이 선글라스 있지. 자기가 내 몸 훔쳐보고 싶을 때만 돌려줄게.”

전철 객실에서의 차디찼던 표정은 간 곳 없고 생글생글 웃는 그녀가 두 손에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술 한 모금 넘기려다가 목에 걸려 기침이 터졌다. 걷잡을 수 없이 터지는, 눈물이 찔끔 나는 기침 위로 그녀의 말이 쏟아져 내렸다.

“놀라긴! 선글라스와 너, 둘 다 내 거라고. 알았지?”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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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