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 황제 신종이 황태자책봉문제로 토라져 침궁에 칩거한 채 30년간 정사를 거부했던 역사의 현장 자금성

관료에게 자율권 없이 국정의 작은 일까지 깨알수첩을 꺼내 지시하고 간섭, 통치능력과 소통의 부재로 민심에서 멀어져...

[골프타임즈=장창호 칼럼리스트] 삼월 첫날입니다. 난방기를 켜는 횟수가 줄고 외출옷도 제법 얇아졌습니다. 분명 봄은 한걸음 성큼 다가왔건만 봄의 희망을 노래할 계제가 아닌 듯합니다. 비정상적인 정권의 붕괴 선고를 앞두고 나라가 둘로 갈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희망을 담고 몰락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겨울 방학동안 짧게나마 베이징을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여행했습니다. 베이징 교외 만리장성의 서쪽 종점 가곡관(嘉谷關)에 올랐습니다.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산과 산 사이에 성곽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장관(壯觀)에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1642년 청나라 팔기군(八旗軍)이 저렇게 높고 길게 쌓은 만리장성을 피해 돌아서 베이징을 침공하였던 역사가 상기되었습니다.

중국말에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다(自毁長城)”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청나라의 이간질에 말려들어 명나라 황제 숭정(崇禎)은 국가의 최후 보루(堡壘)와 같았던 대장군 원숭환(袁崇煥)을 의심하여 처형합니다. 이쯤 되면 만리장성의 견고함은 부질없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습니다.

지금 대통령도 한때는 약 40%에 달하던 철통지지층이 견고하게 정권을 받쳐주었습니다. 견고한 지지를 과신한 나머지 지난 총선에서 무리하게 친박(親朴) 일색의 공천으로 정권 몰락의 징조를 알렸습니다. 총선 이후도 반성보다 민심에 역행하는 일만 골라하다가 몰락을 자초했습니다. 스스로 정권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은 명과 청 두 나라 황제가 거주했던 궁궐이라 규모가 방대합니다. 걷고 또 걸어도 새로운 전각이 나오고 전각마다 아름다워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자꾸 안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게 됩니다. 일정에 쫓겨 구경하는 걸음을 서둘라는 일행의 재촉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전각의 건축미에 취해 사진을 찍다가 문득 이곳에 살았던 이른바 꼴통 황제가 떠올랐습니다. 다름 아닌 명나라 신종(神宗) 곧 만력제(萬曆帝)입니다.

만력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명나라군대를 파병해 준 은인이지만 군주로서의 행각은 어이가 없습니다. 황태자를 세우는 일로 조정과 대립하다가 삐쳐서 자금성 궁궐에 깊이 틀어박혀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정사를 거부했습니다. 조회에 나오기는 고사하고 대신(大臣)과의 접견도 거부하고, 상소도 일절 읽지 않고 종묘사직의 제사마저 외면했습니다. 말하자면 황제가 파업을 한 것입니다.

황제가 30년 동안 파업했으니 각 부서의 기능은 마비되고 관료의 결원이 충당되질 않았으며, 심지어 내각 대신 중에는 황제의 얼굴도 모르는 각료가 수두룩했습니다. 대신들이 그렇게 직접대면 방식의 소대(召對)를 원했건만 국가안보상 중대결정만 서면명령형식의 유지(諭旨)만 하달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국가기능의 마비를 틈타 여진족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주력군대를 섬멸하고 심양(瀋陽)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명사(明史)』의 「신종본기(神宗本紀)」 말미에 “명나라의 멸망은 사실상 신종부터이다”라고 평가를 덧붙였습니다.

대통령은 그동안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만기친람(萬機親覽)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관료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고 국정의 작은 일까지 일일이 수첩을 꺼내 지시하고 간섭해서입니다. 그런데 최순실게이트로 알려진 행적은 만력제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청와대집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숙사에 칩거했다든지, 각료와의 대면보고를 꺼려했다든지, 거의 무위(無爲)의 정치를 실현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만기친람은 대통령의 지인 최순실씨가 도와주는 차원에서 대행한 모양이니 야당과 언론의 비판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봅니다.

자금성을 한 눈에 일람할 수 있는 경산(景山)에서 내려오다가 숭정황제가 목을 매어 자살한 나무를 지나면서 다시 발길을 잠시 멈췄습니다. 숭정은 망국의 혼군(昏君)이지만 여타 혼군하고는 달랐습니다. 특별히 여색에 빠지거나 재물을 탐하지도, 그렇다고 종교에 혼을 빼앗기지도 않았습니다. 되레 청사에 이름을 남길 명군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다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로서의 능력이 너무 딸렸습니다. 자질이 부족했으나 자기주장이 너무 완고했고 성격이 매몰차서 민심을 많이 잃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대통령이 원칙고수가 자신의 정치적 상징구호라 고집이 다소 센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소통의 부재가 기실 무능력에서 기인한다는 증거가 백일하에 많이 드러났습니다. 그릇이 세상물정 모르는 수첩공주가 제격이었는데 혹시 아버지의 후광이 자질로 과대 포장되어 오늘날의 몰락을 앞두고 있다면, 대통령 본인이나 국민 모두에게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삼일절이나 문밖에 선뜻 태극기를 달기 망설여집니다. 태극기의 장엄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태극기를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거리에서 자랑스럽게 흔들고 다녀도 이상한 것이 없는 그날이 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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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호 칼럼리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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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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