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친필 편지를 제출하라고?

귀를 의심하며 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장님의 특별지시라는 말에 잔뜩 무게를 실은 팀장과 눈길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외면했다. 회사가 하다 하다 이젠 별 짓거리 다 한다는 불만을 입안에서 돌돌 굴리다가 꿀꺽 삼켰다.

“아름다운 가정 꾸미기 친필 편지 쓰기 일등 상금이 자그마치 일천만 원입니다. 일천만 원!”

팀장의 얼굴을 곁눈으로 살펴보았다. 일천만 원 상금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에 주먹까지 불끈 쥔 팀장에게 불쑥 미운털 박힌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거 꼭 써야 합니까?”

일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폭삭 무너졌다. 팀원의 눈길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또 너야? 미친다. 미쳐! 제발 입 좀 다물어. 입사 동기의 눈길은 아예 애원이었다. 야! 이만한 회사 없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도 해. 알았어?

이왕지사 엎질러진 물, 한 발 더 나갔다.

“그렇잖아요. 이혼한 사람도 있고. 저처럼 독신주의도 있는데 아름다운 가정 꾸미기 편지 쓰기라니 참 막막하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임직원 모두 무조건 다 쓰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하려 했으나 팀장의 조용한 부름에 눌려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팀장은 화가 날수록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는 사람이었다.

“김 병 호 씨.”

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어서 부른 후 씨 자에서 노려보았다. 또 좋지 않은 상황 발생에 며칠 전의 일까지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그날따라 늦은 시각까지 책상을 지켰다. 정시 출근에 정시 퇴근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바쁜 일이 있을 때는 야근도 마다치 않았다. 내일 출근과 동시에 처리할 급한 서류를 정리한 후 일어설 때 팀장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다 퇴근했나요?”

“예! 저도 퇴근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요? 아무도 없다고요?”

빈자리를 죽 훑어본 팀장이 손짓으로 불렀다. 부서별 팀장 긴급회의가 있었는지 노트북을 켜더니 한 줄짜리 업무지시를 프린트했다.

“할 수 없군요. 남아 있는 사람이 하세요.”

고객 가족 백일장 행사 담당은 내가 아니었다. ‘낭만적이고 획기적인 이벤트 행사 추가할 것’이라고 인쇄된 A4용지를 받았다. 이 한 줄 때문에 프린트하다니, 팀장 당신도 참 한심하다. 그냥 메모지에다 적어줄 것이지.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이 아닌 것에 안심했다. 고객 가족 백일장 담당자 책상에 업무지시 A4용지를 놓으며 문득 팀장도 글씨 노이로제에 걸린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내 글씨 닮은 사람이 또 있으랴, 부인하며 퇴근을 서두르자 팀장이 불렀다. 예의 그 낮은 목소리였다.

“김. 병. 호. 씨!”

돌아섰다.

“그 일 처리 안 합니까?”

“예?”

“급하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제 업무가 아니므로……내일 실무담당자에게 전달하여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경쟁 회사에서 스카우트된 30대 중반의 팀장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화통한가 싶으면 좀스럽고, 느긋한가 싶으면 뭐 마려운 뭐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특판 마케팅 홍보 5명의 팀원은 팀장의 별난 성격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잘 적응했다. 그러나 팀장과 나 사이에는 묘한 감정의 흐름이 첫날부터 생겼다. 이게 뭐지? 갸우뚱하는 순간 첫 사건(?)이 터졌다.

행사현장에서 퇴근하는 바람에 업무일지를 쓰지 못했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업무일지를 쓰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다. 홈페이지의 업무일지이므로 집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게으름 피운 게 악연의 첫 단추가 됐다.

“신나게 놀았나요?”

자리에 앉기도 전 팀장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예?”

“앞으로는 어떻게 놀았는지도 기록하세요.”

“예……?”

“고객들과 잘 노는 것도 훌륭한 마케팅이니까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질책인지 알 수 없는 팀장의 낮은 목소리에 긴장하며 앞으로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제2, 제3의 악연으로 줄줄이 이어져 팀 분위기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첫 번째 업무일지 악연이 떠올라 서둘러 가족백일장 담당자인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퇴근하려고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켤 때 팀장이 불렀다.

“말 그대로 정말 낭만적이고 획기적인 이벤트이어야 합니다. 인기 있는 연예인 초청 따위의 발상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내일 퇴근 전까지 제출하세요.”깍듯한 존대어를 남기고 퇴근하는 팀장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주저앉았다. 내일 퇴근 전까지 제출하라 했으나 아침 업무회의 때 반드시 물을 것이다. 어제 지시한 그거 어떻게 됐어요? 이 독촉에 맞설 수 있는 몇 자의 제목만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도대체 김병호 씨는 뭐 하는 사람입니까? 라는 인격 모독에 가까운 질타가 터질 것이다.

아악! 비명을 지르고 싶은 가슴에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가족에게 친필 편지 쓰기 과제까지 덮쳐오자 아예 눈을 감았다. 이건 한국 최고의 복지 회사에 근무하는 게 아니라 몸 바쳐 일하면서 고문당하고 있는 거다. 내가 왜 고문당해야 해? 이 회사가 뭐 대단하다고.

편지, 그것도 친필로 쓰라니?

가족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쓰던 그것은 고민 대상이 아니었다. 글짓기를 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글씨였다. 지독한 수전증 환자도 아닌데 글씨가 어찌 그 꼴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글자가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만도 못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서예학원의 한글서예 선생도, 글씨 예쁘게 쓰기 학원장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기했다. 바로 두 달 전이었다.

이런 내게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구세주였다. 미륵불이었다. 볼펜, 사인펜, 연필 어느 것도 필요 없이 문자판만 두드리면 모든 게 해결됐다. 그러나 신임 팀장과는 무슨 마가 끼었는지 불편한 일이 계속 발생했고, 여기에 회사까지 가족에게 친필 편지쓰기 의무 제출로 압박해 숨이 막혔다.

컴퓨터 위에 올려놓은 탁상시계가 밤 여덟 시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걸렀다. 시장기가 밀려왔지만,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옆자리 동료의 책상에서 볼펜과 이면지를 챙겨 낭만적이고 획기적인 이벤트 행사 계획서와 사장님 특별지시 가족에게 친필 편지 쓰기를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썼다.

글씨가 아스팔트에 말라비틀어진 지렁이 몰골보다도 못했다. 한글 모르는 유치원 아이가 그려도 이것보다 나리라. 이면지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온몸의 뼈가 파삭파삭 부서지는, 글씨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회사를 나와 소줏집으로 직행했다.

일이 안되려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다음날 지각했다. 팀장은 지각이유를 어제저녁의 업무지시에 대한 반발로 받아들여 오전 내내 불쾌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좌불안석을 견딜 수 없어 개별상담을 신청했다.

“뭡니까?”

팀장은 마주 앉기도 전에 직격탄부터 날렸다.

“저도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장의 눈길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냉랭한 자세였다. 힐끔 팀장의 눈치를 살필 때 지난 이 주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이 주르르 지나갔다. 업무 처리의 큰 착오나 실수가 아닌, 묘한 감정의 충돌이 서로를 불편하게 한 일들이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서로가 번번이 비껴가지 못했다.

“팀장님! 혹시 제게 유감 있습니까?”

“없어요.”

“저도 팀장님에게 유감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서로 나쁜 감정이 없으니 됐군요. 가서 일합시다.”

“아니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일어서려던 팀장이 비로소 눈길을 맞받았다. 또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상당히 부드러워진 몸짓이었다. 한쪽 무릎에 다리를 올리지도 않았다. 팔짱을 꼈지만, 몸을 뒤로 젖히지 않았다. 팀장에게 한발 다가섰다.

“가족에게 친필 편지 쓰기 말입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아름다운 가정 만들기는 편지가 아니라 소설을 쓰라고 하면 열 편이라도 쓰겠다. 그러나 친필만큼은 아니다. 내가 만약 친필 편지를 내놓는다면 팀장님은 물론 회사 임원들이 모두 놀라 기절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글 우리 문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회사에 근무하고 있느냐? 당장 사표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므로 팀장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달라. 아니면 팀장이 내 것을 직접 써서 제출해 달라고 목매달았다.

갑자기 팀장이 킥킥 웃었다.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김병호 씨도 속담처럼 닭발 그리듯 합니까?”

“그러면 다행이게요. 더 합니다.”

“그래요?”

“말도 마십시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괴발개발 닭발 그린 것보다 못하니 미칩니다. 미쳐!”

온갖 불쌍하고 비참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자지러졌다. 너무 자지러져 웃음소리가 쏟아지지 않던 팀장의 입에서 의외의 이실직고가 터졌다. 이번 일요일 날 피자 한 판 사 들고 집으로 와서 여중생 조카에게 필사를 부탁하라는 말끝에 터진 고백이었다.

“난 이미 조카가 필사해 줬어요. 필사!”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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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 문학 파란풍경 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