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오빠! 나야.”

현진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응접실의 탁자에 빈 꽃병이 놓여 있었다. 인모 오빠와 전화 통화가 끝나는 대로 꽃집부터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에 퇴근해?”

인모 오빠는 일간신문의 문화부 기자였다. 고지식한 성격의 그는 주말의 각종 문화 행사를 꼬박꼬박 따라다녔다. 적당히 보도 자료를 인용해 기사 쓰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오빠가 문화행사 취재로 약속 시각을 잘 지키지 않자 아예 행사장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오빠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아 도망치듯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취재라는 말만 나오면 오빠와의 데이트를 무조건 포기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취재가 있다는 말에 속으로 환호했다.

“오늘 시간 없어. 음악회에 가야돼. 내일보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으려는 오빠의 말에 현진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밤 열두시에 아파트로 돌아와도 상관없었다. 외박할 수밖에 없는 지방 취재만 없으면 됐다.

“알았어. 그럼 내일 오후에 그 카페에서 보자. 미안해.”

현진은 미안하다는 오빠의 말에 절로 노래가 나왔다. 음악회 취재가 끝나면 한 잔 걸칠 것이다. 늘 그랬다. 오빠는 밤 취재를 마치면 혼자서라도 술을 마셨다. 그러나 만취되는 법이 없었다. 취재 방법이 고지식하듯 술버릇도 그랬다. 빈틈 보이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이런 오빠이기 때문에 알딸딸한 취기로 귀가해 방문을 여는 순간 오빠는 놀랄 것이다.

현진은 방의 변화에 놀라는 오빠의 모습을 숨어서 보고 싶었다. 그 장소로 옷장을 택했다. 옷장 문을 조금 열어놓으면 모든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과장은 토요일의 결근을 군말 없이 허락했다. 말이 좋아 동남아에 의류를 수출하는 회사이지, 처리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잘 나왔다. 집에는 1박2일 간 직원엠티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코딱지만 한 회사에서 무슨 직원 단합대회냐며 아버지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인모 오빠의 아파트는 사당동의 관악산 기슭에 있었다. 집에서 아파트까지 지하철을 이용하면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두 번째 방문한 오빠의 방과 옷장은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침대 구석에 둘둘 말려 처박힌 이불, 그 위에 나뒹구는 옷가지들. 옷장의 옷도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보다 쑤셔 박힌 것들이 더 많았다.

그의 옷은 하나같이 싸구려에다 유행에 뒤떨어진,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현진은 그의 양복 한 벌과 와이셔츠, 티셔츠를 하나씩 챙겨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가지고 나온 옷의 치수로 양복과 와이셔츠를 세 벌씩 샀다. 티셔츠는 수입 코너에서 골랐다. 팬티도 색색으로 챙겼다. 모양도 여러 종류로 골랐다. 넥타이도 열 개쯤 골랐다.

인모 오빠는 키가 훤칠하게 컸다. 마르긴 했지만, 휘청거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싸구려 디자인의 옷과 어두운 색상의 선택으로 언제나 칙칙한 모습이었다. 현진은 오빠의 그러한 모습이 정말 싫었다. 노골적으로 짜증도 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의 코디네이터로 나서기로 했다.

오빠는 아파트에 혼자 살았다. 가끔 들러 집안 청소와 정리를 해주는, 장차 시부모가 될 두 분은 미국에 가고 없었다. 열흘 정도 머무르다가 귀국한다고 했다. 현진은 그 틈을 노렸다. 오빠의 부모가 아파트에 들리지 않을 때 그의 속옷에서 양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꿔놓기로 했다.

그에게서 아파트 열쇠를 훔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차를 잠시 쓰겠다고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자동차 열쇠고리에 아파트 키까지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연로한 부모님 때문에 비밀번호 전자 게이트맨은 설치하지 않았다.

아파트 열쇠를 복제했다. 계획대로 오빠 모르게 토요일을 디데이로 삼았다.

오빠가 출근하자마자 작전 펼치듯 청소부터 시작했다. 냉장고도 정리했다. 틈틈이 땀이 흥건히 밴 몸을 소파에 묻었다. 앞으로 두 번 더 쇼핑을 해야 했다. 예상에 없었던 침대의 시트커버와 이불, 그리고 베개까지 바꿔놓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현진은 인모 오빠와의 첫 밤을 떠올렸다. 오빠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몸을 요구했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날 밤, 현진은 오빠의 갓 부화된 병아리를 품듯 조심하는 손길에 휘말리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밀어낼 수 있었다.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스물두 살의 순결을 바친 남자의 가슴에 알몸으로 안겨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현진은 오빠와의 뜨거웠던 추억이 마치 현실인 양 짜릿한 진저리를 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쇼핑을 마친 후 방을 정리하고 오빠를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했다. 오빠와 잠자리를 자주 했지만, 그곳은 타인의 공간이었다. 오빠와 나의 방이 아닌, 우리의 이불과 베개가 아닌 누구든지 뒹굴 수 있는 모텔의 공간 속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오늘밤은 아니었다. 그가 성장한 방에서, 내가 준비한 시트와 이불로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었다.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의 반찬거리까지 준비하는 등 모든 일을 끝냈을 때 커다란 벽시계가 밤 아홉시를 알려줬다. 현진은 파김치가 된 몸을 욕조에 뉘었다. 피부의 숨구멍마다 뜨거운 물이 스며들며 전신을 나른하게 했다.

그녀는 인모 오빠가 예상보다 빨리 귀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목욕을 서둘렀다. 매끄러운 피부에 부드러운 손길의 비눗물이 닿을 때마다 그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그의 숨결은 몸 어디에서든 현실처럼 살아서 움직였다.

그의 아파트는 무지개가 뜬 초원이었다. 한 마리의 꽃사슴으로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흥분 바로 그것이었다. 엠티 간다는 거짓말로 집을 나올 때 부모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잠시잠깐이었다. 아파트에서 백화점으로, 식품점으로 뛰어다니는 내내 꿈꾸듯 몽롱했다.

샤워를 마친 현진은 새 시트와 새 이불에서 나는 냄새와 감촉에 전에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설렘으로 눈을 감았다.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잔잔하게 밀려오다가 커다란 파도로 바꿨다. 현진은 그 뜨거운 욕망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오빠는 자정이 넘어도 귀가하지 않았다. 시계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온갖 불길한 상상이 밀려왔다. 거실로 나와 초조하게 서성거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오빠가 전화를 받지 않자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두 번째의 메시지를 남기려 할 때 전화벨리 울렸다.

“오빠! 나 오빠 아파트에 와 있어.”

현진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눈물이 났다.

“어디에 있다고?”

오빠는 술에 취해 말도 제대로 못했다. 전에 없는 일이었다. 오빠가 만취하다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이번에는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오빠 방에 있어. 빨리 와.”

현진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내 방에 있단 말이지?”

“빨리 와. 나 무서워.”

“알았어. 빨리 갈게. 히히히…!”

그는 말끝에 히히 웃었다. 현진은 그의 괴상한 웃음과 함께 들려온 말에 무너졌다. 스마트폰을 껐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히히히 나 오늘 완전히 여자 치마속이네. 여기도 여자, 집에도 여자! 히히히.”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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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