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대합실 의자에 누군가 읽고 버리고 간 신문지가 놓여있었다. 좀 찝찝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곱게 접혀있는 걸 보니 적어도 노숙자가 이불로 덮던 것은 아닌 듯 해 집어왔다. 그런데 펼치고 보니 하필 경제 신문이었다. 콩트며 여기저기 보내는 원고료 몇 푼으로 끼니 때우기도 벅찬 마당에 경제 신문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들쳐 봐도 딱히 읽을 만한 것도 없고 하여 제자리에 던져 놓으려던 순간. 작은 박스기사에 있는 ‘최분도’란 이름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국가 환경정책지원부 본부장에 최분도 선임’

짤막한 알림 기사였다.

최분도!

내 안에서 부글부글 하며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에 대한 감정이 지워지지 않고 옹이처럼 남아있었던 거였다. 그 만이 아니라 그들 전체가 용서되지 않았다. 그들과의 결별이후 나는 운동권도 정치인도 사회운동가도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앞에 서서 마치 이 세상의 선지자인양, 온갖 화려한 구호를 외쳐대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들, 당장이라도 세상을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놓을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지나놓고 보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달라지는 건 그들이었다. 그들을 위한 자리 바뀜. 그들을 위한 푸닥거리였다. 결국 초록은 동색이었고, 신은 무당 편이었다. 세습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 없는 돈에 음식 값을 내놓고 푸닥거리를 해 본들, 내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허망한 희망일 뿐이다. 무당의 돈벌이에 일조했을 뿐이었다. 무당의 신 내림에 휩쓸려 혼이 빠진 듯 매달렸던 일들도 지나보면 안다.

신은 내게 내린 게 아니라 무당에게 내린 것이란 걸. 무당은 돈을 벌었지만 나는 달라진 게 없다는 걸. 무당은 자신의 신에게 받은 복을 결코 내게 나누어 주지 않는 다는 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지구가 뒤집히고, 우주가 폭발해도 풀이 나무가 될 수는 없다. 풀은 언제나 풀이고 나무는 나무다.”

나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인물은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례명을 본명으로 쓰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분명히 그 사람일 확률이 다분히 높았다. 진조홍 부회장 최분도. 당시 그가 경찰에 수배되어 피해 다니고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꽤 알려진 운동권이었던 점을 고려해볼 때 지금쯤 그런 자리 하나 꿰차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이상의 자리라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너희들의 본질이 결국 이런 거였구나.

옛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아버지가 이북에 있다고 늘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늘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우리는 월남가족이라고 자랑스레 대답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북한 사람이에요. 6.25때 피난 나와서 여긴 일가친척 하나도 없지만 이북엔 엄마 아버지 친척이 다 있어요. 커다란 과수원도 있고 강당만한 사과 창고도 있데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교실만한 창고는, 나도 모르게 언제부턴가 강당만한 창고로 바뀌었다.

끔찍하게도 싫었던 가난. 그것은 단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죄가 아니라 조금 불편한 뿐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였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똑같이 잘못을 해도 가난하면 더 혼났고 더 미움을 받았다. 스승의 날이 되도 도무지 감사할 줄을 모르는 뻔뻔한 학생이 돼야 했다.

어느 날 나는 돈을 아끼고 아껴 스승의 날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드렸다. 그리고 그날 청소를 하다가 선생님의 쓰레기통에 가득 버려져있는 몇 개의 카네이션들 속에서 내 카네이션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나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새마을 운동을 만들어 게으름을 타파하고 가난하고 무식한 여공들에게 야간학교를 만들어 배우게 하고........”

새마을 운동을 설명하며 선생님은 우리 국민이 게으르고 무식해서 가난한 것처럼 초등학교 저학년밖에 안된 어린 학생들을 놓고 세뇌시켰다.

그때마다 나는 창피해서 책상 밑으로 내려가 숨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게으르지 않았다. 잠을 쫓기 위해 각성제인 아나뽕을 먹고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했다. 엄마는 못 배운 무지렁이도 결코 아니었다. 그 나이에 이북에서 여고까지 나온 인텔리였다.

그럼 왜인가? 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하지만 감히 엄마에게 왜 우린 이렇게 가난하고 비굴하게 살아야 하는지 묻진 못했다. 물을 써도, 전기를 써도 언제나 눈치를 보았고, 일이 아무리 바빠도 새벽이면 주인 여자가 나오기 전에 먼저 비를 들고 나가 나가 마당을 쓸었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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