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결국 그런 사건 이후 함봉호는 마지못해 그런 군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만의 안위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펜팔 작전으로 국방부 시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조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군대 은어가 생긴 이유도 다 그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해안 초소에서 해안 경비 근무로 매일 바다를 바라보는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데 그만한 위안은 없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낯선 미지의 여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문장 실력을 키우려는 그만의 심산이었다. 지금이야 군대에서 편지를 교환하는 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대로 편지가 많이 오면 대대본부나 중대본부에서 뜯어보거나 없애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사제편지로 받기 위해 부대 인근 마을의 구멍가게를 주소지로 택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부대 주소가 아니어서 상대 여자가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솔직히 사정 이야기를 하면 금세 믿고 넘어가는 문제였다.

함봉호는 처음 펜팔 여성을 여성 주간지에서 구했다. 그 무렵에는 주간지에서 그런 펜팔 상대방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로 여고생이 많았지만 간혹 여대생과 공장의 생산직 여성까지 다양했다. 함봉호는 펜팔 여성이 많다 보니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수첩에다 각기 특징을 메모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한번은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서로 바꿔 넣어 절교 선언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편지는 오래 가지 않아 진실하게 마음을 터놓는 미지의 벗을 만나면서 애인처럼 서로가 푹 빠지는 상황에 도달하기도 했다.

심지어 함봉호가 근무하고 있는 바닷가에 면회를 오고 싶다는 여성도 생길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가지다가도 현실에 부딪쳐 실제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글과 말의 차이, 마음과 실천의 괴리였을까.

하기는 이런 펜팔도 글 쓰는 재주가 없으면 그만한 고역도 없을 터이다. 그런 탓에 함봉호는 이따금 고참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아주 어쩌다가 절교를 선언한 이성이 함봉호의 편지를 받고 감격한 나머지 답장을 할 경우는 그만한 기쁨이 없었다. 그러면 선임 병사는 함봉호에게 고마움의 표시를 함으로써 그만한 대우를 받았다. 그와 함께 함봉호가 그렸던 군대 생활이 부족한 대로 안위하면서 세월을 낚았던 것이다.

아무튼 바보 같은 충성심에 빠져 군대 생활을 마친 함봉호는 세월을 쓸데없이 보낸 만큼 성숙해져 늦게나마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결과 원하지 않았지만 차선의 선택으로 다시 소설을 쓰는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입학하자마자 대학 학보사에 투고할 단편소설을 사흘 만에 써서 제출했다. 원고료가 10만원으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이었기에 일단은 쌀부터 확보하자는 순수한 촌놈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잘못된 계산이었다. 입학생 신분으로 선배들을 제치고 학보에 소설을 싣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적어도 대학에서 소설 공부를 한 선배의 작품을 우선 싣는 것이 순서였다. 아무리 훌륭한 입학생의 소설이라 해도 먼저 실을 수는 없었다.

당시 학보사 편집장은 함봉호의 작품을 게재하려고 했지만 주간 교수는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주간 교수는 함봉호를 불러 이 작품을 직접 쓴 것이냐고 확인한 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반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함봉호는 그 소설을 가지고 있다가 제목만 바꿔 그 해 가을 일류대학교에서 공모한 전국대학생현상문예에 당선된 것이다. 그 결과 대학의 주간교수는 당황했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함봉호는 그 대학의 학보사 시험에 응시해 당당하게 수석 합격해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만큼 함봉호는 소설이나 기자로서 두각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함봉호는 대학교수들의 눈에도 자연스럽게 띄었다. 문제는 그놈의 전국대학생현상문예 당선 때문이다. 재학생 중에서 그것도 학보사 기자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중에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는 교수가 두 명이 있었다. 한 분은 출판편집 실기를 담당하고 다른 한 분은 시 창작을 가르치는 시인 교수였다. 함봉호는 출판편집 실기 점수를 거의 만점에 가까울 만큼 A+를 받는 반면 시 창작은 시 점수가 좋지 않아 B+를 받았다.

시인 교수는 1학년 2학기 때 함봉호를 가르친 인연으로 줄곧 술자리가 이어져 연락이 되었다. 1학년 겨울방학 때는 출판사로 불러 단행본 교정 일까지 맡겼다. 사실 함봉호로서는 감히 자신이 단행본 출판물을 교정과 교열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함봉호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줬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시인 교수는 이따금 함봉호를 불러 일을 시켰다. 물론 완벽한 작품이 아니었겠지만 그런 대로 제법 보니까 일감을 계속 던져주었다. 출판 교정 일을 마치면 시인 교수는 대학로의 식당으로 불러 불고기를 사주고 수고비로 10만원 수표를 한 장 주었다.

사실 시골 촌놈이 어쩌다가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대학에 들어왔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신춘문예 출신의 유명한 시인 교수의 눈에 들었으니 여간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봉호로서는 감히 만날 수 없는 인기 작가들까지 등장하는 술자리로 불러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은사님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함봉호는 어쩌다가 한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시인 교수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책을 몇 권이나 교열과 교정을 끝낸 경험이 있던 함봉호로서는 이제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었다. 게다가 출판사의 여자 편집장도 동갑인 데다 자신을 인정해 줘 나름대로 일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어느새 함봉호는 2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시인 교수가 기획한 문학 전문서의 교열과 교정 일을 맡았다. 이미 웬만큼 신임을 얻어 그 책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책 제목이 『문학으로 가는 길』인 만큼 명성 있는 작가와 평론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필자들이 거의 시인 교수와 지인이나 친구 작가들이 많았다. 그 바람에 함봉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하고 조심스럽게 원고를 대했다. 그런데 그 중에 소설가이면서 4년제 대학의 국문과 교수가 쓴 글이 함봉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적어도 책의 소재가 ‘문학으로 가는 길’이라면 그에 합당한 단어와 소재로 하여금 주제에 몰입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함봉호는 그 필자를 시인 교수의 소개로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났다. 결국 그는 아주 냉정한 제삼자가 되어 문제의 그 원고 하나만큼은 사정없이 빨간 펜으로 박박 그어댔다. 마침내 수정한 원고 교정지를 여자 편집장한테 갖다 주자 그녀는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이 수준까지 고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여자 편집장은 사색이 되어 시인 교수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 함봉호는 그대로 집에 갔다가 며칠 후 재교를 보라고 해서 출판사로 찾아왔다. 그런데 그도 깜짝 놀랄 만한 시인 교수의 결정을 접했다. 함봉호가 빨갛게 교정한 대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여자 편집장도 놀랐지만 정작 더 놀란 장본인은 함봉호였다. 설마 함봉호가 고친 것 중에서 일부 잘못된 수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대로 다 손을 보라는 데 놀라지 않을 놈이 어디 있을까. 더욱이 그 필자는 시인 교수와 막역한 동갑내기 친구 사이였다.

그러구러 반가운 책이 세상에 나왔다. 시인 교수는 자취하는 함봉호의 주인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학로 술집으로 나오라고 했다. 일종의 책거리를 위한 초대였다. ‘책거리’라면 책을 한 권 뗄 때마다 훈장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행사인데 이 자리는 어딘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함봉호는 가뜩이나 유일하게 빨간 펜으로 용감무쌍하게 고쳤던 그 주인공 교수가 자리를 함께한 탓에 잔뜩 긴장을 했다. 괜히 지나치게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가면서 자리가 좋아졌다. 사실 알고 보면 화기애매한 자리가 맞는데 어딘가 위선이 잠재된 그런 분위기를 함봉호는 속으로 감지했다. 그러나 나이가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은사님 앞에서 그는 최대한 겸손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다행히 시인 교수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노력한 탓에 어쭙잖게 책 교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그 필자 교수는 조교가 넘긴 원고를 자신이 한번 체크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완결되지 못한 원고를 함봉호가 제대로 잡아 주어 고맙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함봉호의 은사도 잘했다며 추켜세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필자 교수가 술에 취하자 은연중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술자리의 탁자 유리를 보고 손바닥의 흉터를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에 저지른 객기의 상처라는 것이다. 사실은 함봉호에게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표시였다.

그래도 그렇지 나이 어린놈이 함부로 내 원고를 무지막지하게 칼질을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함봉호는 속으로 웃었다. 결국 제자인 조교에게 핑계를 댄 것은 거짓말이었음을….

결국 그 사건 이후 시인 교수는 함봉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미 은사는 함봉호를 어느 정도 키워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낙점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 교수는 2학년 가을 학기가 끝나갈 무렵 함봉호에게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아직 졸업하기 전이었지만 월간 잡지사였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면접은 사장이 아닌 편집장과 했는데 그대로 쉽게 통과됐다. 시인 교수는 함봉호가 사회성이 약한 것을 알고 일부러 그 잡지사에 추천했던 셈이다. 그곳의 편집장과 차장, 그리고 주간과 미술 디자이너 등은 이른바 운동권으로 불리는 기가 센 핵심 세력들이었다.

함봉호는 그제야 시인 교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착하고 비운동권적인 함봉호의 사상과 사회성을 나름대로 개조하려는 심산이었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 시절 그 월간지의 창간호 특집 기사는 ‘최루탄, 무엇이 문제인가?’였다. 그야말로 기가 센 내용이었다. 그 바람에 그 월간지는 3개월 정간을 당한 후 새롭게 취재진을 뽑아 다음 호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잡지사 사장은 기존 편집장을 교체하려고 마음먹던 차에 함봉호라는 신입기자마저 출근하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장은 더 이상 잡지를 발행하지 못하겠다고 버틴 반면 편집장은 이제 3개월이 지났으니 재창간해야 한다고 맞섰다.

함봉호는 첫 직장으로 택한 잡지사에서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출근했다가 편집장과 일행들이 사주는 밥과 술을 얻어먹으면서 몇 달을 보냈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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