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우리 주간지는 기사 위주의 잡지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화행사를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해준다고만 생각하면 돼. 설사 기자들의 학력과 식견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문화 행사의 취지와 의미를 곡해하거나 함부로 평을 하면 안 돼. 그 이벤트를 보고자 하는 관객의 수준과 이해도도 미처 판단할 수 없는데 그들에게 미리 김을 뺄 수는 없잖아. 가장 무서운 기사가 바로 논평을 자제하고 6하 원칙에 따라 이벤트의 개요만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지.”

“네, 잘 압니다. 국장님이 저에게 주신 일본 ‘피아’를 훑어보니 지금 국장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글 잘 쓰는 기자보다 요점 정리 잘하는 꼼꼼한 아이들이 더 낫다고 하신 거군요.”

“그래, 역시 빨리 이해하는구먼. 그래서 앞으로 잡지를 창간하면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정식보다 촉탁으로 쓰도록 하게. 물론 그마저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채용해서 써야 돼. 처음 창간하는데 적자를 줄이려면 인건비를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우리 신문사에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계약직 사원이라고 하면 거부 반응 같은 것이 없을까요? 사실 신문사 조직에서 촉탁직을 쓰는 것은 우리가 최초의 일이 아닌가요?”

“무슨 최초? 계약직 사원은 그 전부터 있어 왔어. 다만 신문사 입장에서 대외 체면상 촉탁직을 뽑지 않은 것이지. 그리고 최근 들어 강경해진 노조 때문에 그럴 뿐이지. 촉탁도 상황에 따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네. 우리가 앞으로 창간할 주간지의 성향으로 볼 때 정식 직원이 아닌 계약직 사원으로 써도 무방할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입에 맞는 친구들을 구해서 쓸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우선 자네가 시험판부터 잘 만들고 보게. 그 다음은 나중 문제이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시험판 제작 아르바이트 학생은 제가 임의대로 구해서 쓸게요.”

“당연히 그러게. 너무 박하게 하지 말고 최대한 여유롭게 사람을 써서 잘 준비해 봐. 무엇보다 영화관이나 극장 등 공연장 지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정밀지도 구입비와 인건비는 얼마든지 지원해줄 테니까. 이 창간 사업은 신임 사장이 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하는 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추진하도록 해봐. 자네는 더욱이 예술대학에서 학보사 편집장도 한 만큼 다양한 예술 분야에 대해 두루 잘 알 테니까.”

최인규 국장은 함봉호에게 처음 일을 맡길 때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함봉호도 물을 만난 고기처럼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을 맡은 데 대한 기쁨으로 자신감을 마음껏 내비쳤다. 그와 함께 자신이 받고 있는 불이익을 이번 기회에 해소해 보자는 욕심도 당연히 들었다.

주간지 창간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했다. 굳이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완성되기 전에 떠벌리는 것은 좋지 않다. 더구나 정식 기자들을 채용해서 떳떳하게 주간지를 발행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소문은 새어 나가게 마련이다. 한동안 출판부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기자 일을 하고 싶어 직장을 옮겨 간 선배인 박기호가 전화를 해온 것이다.

함봉호와 친한 관계였기에 그는 솔직히 향후 진행 과정을 털어놓았다. 신임 사장이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을 주간지 취재부장으로 이미 점찍어 둔 듯하니 괜히 헛물 켜서 쪽팔리는 것보다 모른 척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선배는 애초부터 기사 쓰는 기자 일을 하고 싶어 신문사에 들어왔는데 막상 출판 일을 하고부터는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해 왔던 터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한 함봉호에게도 미리 말하지 않은 채 사표를 쓰고 새로 창간한 신문사로 이직했다. 그 신문사는 종합신문사가 아닌 규모가 작은 전문직 신문인 관계로 그의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월급은 물론 조직체 구성상 무엇 하나 제대로 맞는 것이 없을 터여서 이런저런 고민 끝에 복직하여 주간지 취재부장이라도 맡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기호가 주간지 창간 작업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러나 함봉호는 솔직히 박기호가 자신의 직속 부장이 되어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서로 잘 통했기 때문이다. 함봉호가 출판부로 전입되어 처음 일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박기호는 화통했다. 그는 우선 신입사원인 함봉호에게 출판 일을 솔직하게 두루 잘 가르쳐주었다. 그때는 사진식자가 나오기 이전이라 납 활자로 조판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조판 인쇄소 거래처를 함께 방문하고, 출판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든 출판 작업 현황과 장부 정리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특히 박기호가 함봉호에게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의 솔직한 배려에서였다. 그 당시 회사에 입사하는 과정에서 불편한 일이 많았던 함봉호는 괴로운 나머지 퇴근 후 술자리를 자주 가졌는데 과음한 다음 날이 문제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박기호는 술 냄새가 풀풀 나며 괴로워하는 함봉호를 슬며시 거래처에 간다며 데려나가 사우나에서 쉬고 오게 하는 배려를 베풀었다. 일테면 담당부장인 홍달표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함봉호를 보살펴 준 것이다. 그러니 함봉호로서는 인간적으로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더 엄청나게 놀라운 점은 교열과 교정을 보다가 모르는 것이나 애매한 문장이 있으면 체면 같은 것은 따질 필요도 없이 무조건 함봉호에게 물어보는 솔직성이었다. 적어도 웬만한 선배 직장인들은 설사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후배에게 물어보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 선배가 후배보다 못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꼴로 스스로 궤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탓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 중에서 후배에게 가르쳐달라는 선배가 얼마나 될까. 그랬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이 직장에서 살아남는 정석이었기에.

그런 반면 교정 실력이 좀 부족한 다른 동료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철저하게 중용을 지키다가 종국에는 홍달표 부장 선에서 걸러지는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실 교열과 교정은 아무리 잘 봐도 완벽하게 바로잡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교열과 교정 방법이다. 물론 그 분야에도 분명히 고수는 존재한다. 함봉호는 박기호뿐만 아니라 그동안 많은 교열과 교정 일을 하면서 그 실력을 인정받아 왔다.

함봉호는 그래서 어느 날 최인규 국장과 술자리를 하던 중에 조심스럽게 박기호를 주간지 취재부장으로 영입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그러자 최 국장은 이미 신임 사장이 미국에서 있을 때 점찍어 둔 사람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함봉호는 그 사실을 듣고 바로 박기호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해 준 것이다. 하지만 최 국장도 박기호를 좋게 보고 있다며 사장이 찍은 사람이 아니라면 채용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런 점에서 최 국장은 함봉호와 잘 통하는 편이었다.

주간지 「피아」 시험판은 조용하게 작업이 진행됐다. 최 국장은 자신이 직접 빽빽하게 메모한 대학노트를 함봉호에게 참고 자료로 쓰라고 전해 주었다. 메모하는 습관이 철저한 함봉호도 보고서 놀랄 만큼 완벽한 자료였다. 최 국장은 편집국에서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무슨 일인지 잘 모르지만 공무국장으로 밀려난 이후 출판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나마 한직인 판매국장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최고로 힘든 판매국으로 전출되면 거의 신문사 생활 조직으로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은 함봉호가 그 화제의 주인공이다. 그는 처음에 잘못 입사하는 바람에 판매국으로 발령받아 6개월 동안 한직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출판국으로 옮겨온 기적 같은 주인공이다. 도저히 드라마나 소설이 아니면 현실로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므로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함봉호는 주간지 시험판을 만들면서 과거의 일은 깨끗이 잊고 개과천선한 신분으로 온갖 열성을 들여 최선을 다했다. 최 국장은 함봉호를 위해 출판국에 달린 사무실이 아닌 별실을 꾸며 시험판 제작팀들이 일하게 만들어주었다. 넓은 방에 서너 개의 책상뿐이어서 삭막하고 황량했지만 오히려 일하기에는 좋았다.

함봉호는 때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여대생 2명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기용해 일을 시켰다. 두 여학생은 함봉호의 고교 동창생 친구의 처제들로 일의 효율성을 위해 특별 채용했다. 그들은 함봉호가 추진하는 시험판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자료 수집과 전화 확인 작업을 했다. 친구의 처제들인 관계로 자칫 불편할 수도 있었으나 의외로 착한 아이들이서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보다 더 핵심적인 추진 사업은 서울 수도권과 5대 도시의 문화지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그 전에 누군가 해본 적도 없는 최초의 일이어서 순전히 창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웬만하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난제였다. 그러나 함봉호는 최 국장의 의도를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래서 문화지도 완성 작업은 그 어떤 일보다 더 많은 인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지도를 일목요연하게 그릴 수 있는 디자인 전공 졸업생과 현장을 다니며 지도 작업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대학생이 필요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원을 쓰는 데 거기에 마땅한 사람을 찾는 일이란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최 국장이 디자인을 전공한 남학생을 추천해 줘 함봉호가 취약한 분야를 알아서 지원해 줬다. 그런 점에서도 최 국장과 함봉호는 나이 차가 나는 갭을 막아주는 등 서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디자인을 전공한 남학생은 최 국장 친구의 아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남학생이 고백하면서 안 것이다. 최 국장도 함봉호에게 불편해 할까 싶어 그 사실을 숨겼을 터이다. 실제 최 국장이 최고 결재권자이기에 앞으로 일할 사람을 수없이 추천할 것이 뻔했다. 다만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함봉호에게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여부는 알아서 판단하라는 권한을 주었지만 그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기사를 잘 쓰느냐 못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상 제대로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잘해낼 수 있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굳이 엄정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최 국장이 소개해 주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데리고 써도 무방했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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