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지난해 여름, 그날 밤처럼 비가 왔다.

미정은 김 국장을 유혹했던 이 층 카페로 올라갔다. 맥주와 소주, 그리고 오징어 안주를 주문했다.

넌 정말 당돌한 아이야.

처음으로 밤을 함께 보낸 다음 날 아침의 김 국장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호텔의 창가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담배만 피웠다.

미정은 그날의 김 국장 얼굴을 떠올리며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김 국장은 늘 소주였고 미정은 맥주였다. 그녀의 성화에 간혹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셨지만, 적당히 마시는 척할 뿐이었다.

미정은 창밖의 비 오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난해 여름의 열병을 떠올렸다. 학교 졸업 후 일 년 가까이 여행만 다니자 어머니가 김 국장에게 취직 부탁을 했다. 어머니의 등쌀에 마지못해 전화했다. 그것이 김 국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내일 오전에 편집국으로 와요.

미정은 편집국으로 김 국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신문사와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어머니가 부탁했다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력서를 내밀며 취직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반 시간 가까이 수첩에 낙서하다가 약속은 약속이다 싶어 전화했다.

점심 안 먹었지? 우리 밥 먹자.

김 국장은 마치 딸 대하듯 말을 놓았다. 신문사의 일층 로비로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미정은 취직보다 김 국장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화 목소리로 보아서는 사십 대 같았다. 목소리가 다정다감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헐렁한 와이셔츠에 풀어진 넥타이. 김 국장의 머리는 반백이었지만, 얼굴은 동안이었다.

음식 안 가리지?

순댓국 두 그릇과 소주가 차려지자 김 국장은 웃음이 깃든 잔잔한 눈길로 잔 가득히 술을 따랐다. 미정은 김 국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미정은 김 국장의 허물없이 대해 주는 마음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 집을 나설 때는 짜증스러웠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력서 가지고 왔지?

미정은 책갈피에서 하얀 편지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는 봉투를 반으로 접어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왜 안 읽어보세요?

미정은 따지듯 물었던 그 날의 말투가 지금도 싫었다. 그냥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 될 것을 마치 자존심 상한 여자애처럼 버릇없이 굴었던 그 날의 행동이 조금 전 일처럼 민망했다.

카페에는 손님이 없었다.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우려다 김 국장의 몫으로 따라놓은 잔을 비웠다. 여자가 먹으면 음기가 동한다는 오징어의 긴 다리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김 국장과 함께 있었다면 또 야단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다시 일 년 전의 그 날, 순댓국집으로 돌아갔다.

바보 같은 놈! 사회 초년생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라는 거 뻔하잖아.

김 국장의 핀잔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지며 편안해졌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미정은 작게 웃었다.

김 국장은 취직하겠다는 놈이 낮술부터 챙기느냐고 하면서도 술을 따라주었다. 그때의 허허 웃던 얼굴이 사라지고 괴로워하면서도 번번이 유혹에 넘어갔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 국장의 부인과 중‧고등학교 남매의 얼굴도 다가왔다.

미정은 김 국장의 배려로 취직이 되자 집을 찾아갔었다. 직장을 구해준 고마움의 표시였지만, 그건 핑계였다. 그의 가정생활이 보고 싶었다. 집에서도 그렇게 다정다감하게 살까, 궁금했다.

김 국장은 주방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감자부침을 부치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인과 남매는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거리다 아가씨 손님에 어색해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부러웠다. 부인의 자리에 자신을 앉히고 남매를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 상상했다. 무심코 생각한 것이었는데, 그 순간 김 국장을 유혹해야겠다는 질투가 거센 파도로 밀려왔다.

사회초년생에 대한 김 국장의 자상한 보살핌은 오히려 유혹의 초조감을 불러일으켰다. 중년의 남자, 그가 포근한 남자로 가슴에 자리매김 되면서 불면의 밤이 계속됐다.

미정이가 날 유혹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못써요.

미정은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다행히 서로의 직장이 가깝고, 집 방향이 같아 밤늦은 시각까지 떼를 쓸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어때? 어머니가 걱정 많이 하시던데.

미정은 아버지의 얘기만 나오면 풀이 죽었다. 아버지는 술 중독의 합병증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국장이 난처한 순간마다 아버지의 얘기를 꺼내는 까닭을 미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정은 딸처럼 여기는 김 국장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였다. 나이를 떠나,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외면한 가슴 깊이 들어와 앉은 남자였다.

토요일 오후, 며칠째 장마가 계속됐다.

어둠이 깔리면서 시작된 카페에서의 술자리를 미정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간간이 훌쩍훌쩍 울었다. 물론 연극이었다. 주정도 했다. 당신은 결코 도덕과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 위선적인 행동에 화가 난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 국장은 취기를 버거워했다. 미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리 잡아놓은 호텔로 부축해 데려갔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잖아.

미정은 침대에 너부러진 김 국장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샤워를 했다. 술에 취해 떨어졌던 김 국장이 깨어나자 막무가내로 파고들었다. 김 국장은 미정의 매달림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넌 당돌한 아이야.

김 국장은 그날 이후 외박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미정은 행복한 여자의 기쁨에 들떴다.

미정은 여름을 그의 가슴에서 보냈다. 사람들이 열대야 현상으로 지쳐있을 때 미정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미정은 김 국장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카페 여사장이 다가와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미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일본으로 가기 전날, 김 국장이 긴 침묵 끝에 한 말이 떠올랐다.

미안해.

일본에 있는 동안, 일 년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한 목소리였다. 김 국장이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사과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터졌다. 만날수록 깊어지는 상처, 김 국장은 그 무거운 짐은 혼자 감내하고 있었다.

미정은 스마트폰의 김 국장 전화번호를 열었다. 그는 미정의 귀국을 모르고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도 문자 한 번 보내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숱하게 썼지만, 매번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그 목소리 때문에 차마 문자를 보낼 수 없었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김 국장의 소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단숨에 비웠다. 마치 마주 앉은 김 국장을 바라보듯 안개꽃 같은 웃음을 짓다가 지금까지 망설인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순간 끝없는 절벽으로 추락하는 현기증 속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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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