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맥주?”

윤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천정과 바닥. 사방의 벽, 탁자와 의자까지 하얀색이라 마치 눈밭에 빠진 기분이었다.

김지수 차장은 맥주와 과일 안주를 주문했다. 그는 바닥에 내려놨던 쇼핑백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비닐 백에는 남대문시장의 노점에서 산 싸구려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기분 상해?”

윤정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김 차장은 반듯한 양복 한 벌 없었다. 재고품의 덤핑들만 골라서 사 입는지 하나같이 유행에 뒤떨어진 옷뿐이었다.

“난 모델이 아냐.”

윤정은 여전히 창밖만 내다봤다.

그녀는 김 차장에게 또 실망했다. 시장바닥의 난전 아무 곳에서나 옷을 사는 모습에 기가 찼다. 튀는 멋은 못 낼망정 싸구려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한 옷이 편해.”

“그것도 어느 정도죠.”

윤정은 화를 냈다.

그녀는 옷의 선택에 매우 민감했다. 재래시장에서는 양말 하나 사지 않았다. 백화점과 의상실만 이용했다. 백화점에서도 기성복 점포는 얼씬하지 않았고, 세일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약속해요.”

윤정은 맥주잔을 들며 말했다.

“무슨 약속?”

“앞으로 싸구려 옷은 사지 않겠다고.”

“그게 어때서?”

“난 싫어요.”

“옷 입는 사람은 나지, 윤정이가 아니야.”

윤정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김 차장은 평생 놀아도 될 만큼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적당한 시기에 회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할 계획이었다. 이미 그 준비가 상당히 진척될 상태였다. 그런 그가 옷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 하다니 짜증스러웠다. 같이 다니기가 창피했다.

“이제부터 내가 자기 코디 담당이에요. 아셨죠?”

“글쎄? 그건 생각 좀 해야겠는데.”

“딴소리 마세요.”

윤정은 그의 옷장 속의 옷을 떠올렸다. 쓸 만한 옷이 하나도 없었다. 속옷과 양말도 마찬가지였다. 흰색 일변도였다. 그나마도 색깔이 바래 누리끼리했다.

“겉멋 내는 남자…한 마디로 한심한 놈들이지.”

김 차장이 빈정거리자 윤정은 발끈 화를 냈다.

“옷은 여자든 남자든 그 사람의 품위에요.”

“하여간 내가 알아서 할 거에요.”

윤정은 당장 양복점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유럽풍 맞춤양복으로 정장한 그를 상상하자 조바심이 밀려왔다.

“일어나요.”

윤정은 프랑스제 명품 핸드백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앉아.”

김 차장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나가요.”

윤정은 고집을 세웠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

윤정은 눈치 빠른 그가 미웠다. 기분 같아서는 정말 혼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갈 수 없었다. 주말을 그의 아파트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의 남자였다. 그는 첫 남자와 달랐다. 은근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사랑의 행위 때에는 언제나 여자를 기다려 주었다. 절정의 환호성을 부끄러움 없이 토해낼 수 있도록 뜨거운 불꽃으로 감쌌다.

“윤정아!”

자리에 다시 앉자 김 차장이 불렀다.

“그까짓 옷 때문에 다투지 말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양보하면 되잖아요.”

윤정은 자리에 다시 않으며 울상을 했다.

“성격인 걸 어떻게 해? 그냥 적당히 넘어가주라.”

윤정은 그의 머리를 쳐다봤다.

그의 헤어스타일도 못마땅했다. 바싹 치켜 깎은 머리는 마치 작은 모래무덤 같았다.

“이발 어디서 했어요?”

윤정이의 안타까운 표정에 김 차장이 두 손을 모았다.

“이번에는 헤어스타일 전쟁인가? 목욕탕에서 대충 깎았어. 언제나 그래.”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그게 좋아. 편해.”

김 차장의 말에 윤정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챙겨주면 그도 변할 것이라고 자신한 게 일 년 전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외모에 반했다. 시원스러운 얼굴에 훤칠한 키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혼상대로 그려왔던 이상형의 외모였다.

그러나 차림새는 기가 찼다. 딴에는 첫 만남이라고 정장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입은 양복은 사오십 대들도 입지 않는 구식이었다. 웃옷의 뒤가 양쪽으로 터진 것이었다. 그때 윤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곁에서 다듬어 주면 더 없이 멋진 남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숨어 있는 웃음이었다.

윤정은 코디에 자신이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싶은 욕심에 그의 돌진을 피하지 않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아 오히려 그를 유혹한 건 그녀였다.

“넌 옷에 너무 집착해. 그게 난 싫어.”

김 차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남대문시장에서 티셔츠를 살 때의 네 표정…….”

윤정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 마디로 절망이었어.”

김 차장의 절망이란 말에 윤정은 눈을 감았다. 애써 버티고 있던 자존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던 첫날을 떠올렸다. 그를 유혹한 그 밤부터 착각의 시작이었다. 그는 결코 세련미 넘치는 연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지금껏 환상 속에 빠져 일 년을 보냈다. 그걸 이제는 마침표를 찍어야 할 순간이었다. 미련 없이 버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일어서야 했다.

윤정은 빠른 손놀림으로 코트와 핸드백을 챙겼다.

“난 노점 남자는 싫어요. 그만 헤어져요.”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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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