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구본하의 의료보험증은 그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있었다. 의료보험증은 그가 한 번도 병원에 다녀온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깨끗하다. 부양자도 없이 달랑 구본하 개인의 이름만 올라 있다. 함봉호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괜히 구본하가 불쌍한 생각이 든다.

함봉호가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구본하는 이미 치료가 다 끝나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붕대로 상처 부위를 덮어씌운 모습이 웃음을 절로 나오게 만든다.

구본하는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원무과에 가 계산을 마쳤다. 상처가 크지 않아 치료비는 그리 많지 않게 나왔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에이, 그까짓 거 가지고 뭘요? 상처가 덧나지 않게 조심이나 해요.”

“자, 그만 가지. 그나저나 집에 전화나 해두었나?”

“진작에 좀 늦는다고 전화했어요. 참, 유미리가 가면서 몸조리 잘하라고 하더군요.”

“그래?”

“유미리가 구 선배한테 관심이 좀 있는 것 같던데….”

“아니야. 유미리는 누구한테나 잘해.”

“하핫,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던데…. 아무튼 한번 잘해 보세요.”

“알았네. 그럼 이만 가세.”

두 사람은 병원 앞에서 헤어진다. 구본하는 택시를 타고, 함봉호는 지하철 쪽으로 걸어간다. 어느새 시간은 11시를 넘기고 있다.

커브를 돌아 막 극장 앞을 지나칠 때이다. 어디선가 눈에 익은 사람이 앞서 가고 있다. 뒷모습만 보아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한 어깨선이다. 남자는 분명히 박철수 실장이고, 여자는 여향미이다. 함봉호가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람이 가깝다는 사실은 구본하로부터 익히 들어 알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은 없다. 함봉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길가로 피해 걷는다.

‘저 자식, 등잔 밑이 어둡다는 사실을 너무 잘 이용하는 거 아냐.’

‘하기는 저 자식이 누굴 겁내는 놈인가?’

함봉호는 속으로 시부렁거린다.

그러자 한바탕 욕지기까지 솟구친다. 술 때문에 속이 불편하지만 참을 정도는 된다.

함봉호는 불현듯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유미리가 출연하는 영화 「여름은 간다」에서 여자의 뒤를 좇는 범인처럼.

박철수는 여전히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걷고 있다. 함봉호가 그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어디선가 술을 마셨는지 약간은 비틀거린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음주운전이 분명하다. 갈지자걸음이 그를 입증한다.

두 사람은 갑자기 극장 앞에서 멈춘다. 함봉호는 재빨리 신문 가판대 뒤로 몸을 숨긴다. 불현듯 턱까지 숨이 차오른다. 긴장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가 쏠쏠하다.

택시가 그들 앞에 서자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탄다.

‘어쭈?’

함봉호도 급한 김에 모범택시를 잡아탄다. 모범택시는 항상 극장 앞에 대기 중이다. 좀은 비싸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대신 곧바로 탈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추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택시비가 비싸든 싸든 상관할 바 아니다.

“기사 아저씨, 저 택시 좀 따라가실래요?”

“네, 알았습니다.”

“바짝 따라가도 괜찮아요.”

“그래도 너무 바짝 붙으면 좀…?”

“괜찮습니다.”

함봉호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박철수와 여향미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눈치를 못 챌 것으로 확신한다. 설마 그 누가 그들의 뒤를 밟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터이다.

함봉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좀은 무모하게 하는 이런 짓도 따지고 보면 술기운에 의한 것이다. 술이란 적당히 마시면 이성을 차갑게 하지만 지나치면 감성을 건드리게 마련이다. 결국 그것이 도가 넘어 실수를 저지르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함봉호는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지금 벌이는 예상치 않았던 행각은 엄정한 법의 잣대라고 다독거린다.

‘이것은 어용 노조를 이끄는 일부 세력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직원들에 저지르는 부당한 처우에 대한 합당한 뒷조사이다. 사원에게 주식을 분배하라고 유언한 창업주의 뜻을 위약한 데 대한 준엄한 응징이다.’

함봉호는 창업주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가 입사하기 5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도 함봉호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창업주를 존경했다. 그는 창업주 추모록을 만들던 신입 사원 시절에 그의 위대한 업적을 익히 가늠할 수 있었다.

함봉호는 그 당시 창업주를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원고를 채집하여 교정보는 일을 했다. 물론 원고 청탁은 이병채 상무가 맡았다. 함봉호는 출판부 소속이면서도 이 상무와 단 둘이 추모록 작업을 했다. 심지어 이 상무는 홍달표 부장도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접근을 금지시켰다.

이 상무는 필요 이상으로 윗사람에게 아첨하길 좋아하는 홍 부장의 속셈을 미리 간파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껄끄러운 것도 없다. 부하 직원이 중간의 직속 상사를 외면한 채 높은 사람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다.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훗날 후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달표는 그런 함봉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홍달표는 함봉호를 상부에 보고할 때 좋게 말할 턱이 없다. 잘한 것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숨길 수밖에. 그 대신 어쩌다 실수를 하면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그의 첫 작품인 『수요공급 살인사건』도 출간된 지 두 달 만에 3판까지 찍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한때 각 신문사마다 붐이 일었던 ‘어린이 경제교실’과 ‘고교생 경제교실’도 사실은 그가 그 당시에 벌써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그뿐만 아니라 집단생활을 하면서 영어로만 대화하는 ‘어린이 영어캠프’도 함봉호의 작품이다. 또한 아직까지 나오는 부동산 광고 무가지인 ‘벼룩시장’도 처음에는 그의 아이디어였다. 게다가 요즘 일반화된 신문의 가로쓰기도 그 무렵 함봉호가 회사에 아이디어를 내놓았지만 일축되었다. 그렇다면 함봉호는 어째서 이런 엄청난 아이디어를 회사에 제공했을까.

그 당시 신문사 사장은 전 직원들에게 신문 구독을 의무적으로 주변 지인들에게 권유하고, 더불어 회사 발전에 필요한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도록 했다. 그만큼 사장은 회사 발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중간의 간부 놈들에게 있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그것이 온전히 사장 선에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매장당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는 슬그머니 없애 버리고 뒤로 빼돌린 것이다. 그러니 회사가 발전할 턱이 없다.

아무튼 함봉호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신문사 조직에서는 불행한 족속이다.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단추를 잘못 꿴 탓에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그것이 다시 원래대로 잘 꿰맞춰질 리가 없다. 한번 천민은 영원한 천민이라는 굴레가 회사 조직에서도 무참하게 쓰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러나 함봉호는 처절하게 그 쓴맛을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그 엄청난 음모와 모략에서 벗어난 줄 착각하고 살았지만 끝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느낀 것은 그 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함봉호만 바보 같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회사는 그에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모른 척하면서 철저하게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런 회사의 음모는 어느 날 문득 함봉호로부터 시말서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것도 함봉호를 전혀 모르는 편집국에서 밀려온 부국장이란 놈으로부터…. 그는 도대체 처음 본 함봉호를 왜 그토록 미워했을까.

어쨌든 함봉호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보다 한 발 앞서 갔다. 하지만 적이 많은 관계로 빛을 못 보고 사장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업주가 바로 그런 식의 사람이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맨몸으로 신문사를 창업했다. 돈도 많지 않았다. 다만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감뿐이었다. 작은 규모의 신문사에 재직 중이던 그는 뜻 맞는 몇 사람과 모험을 감행했다.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직원들의 월급은 제때에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수월치 않을 경우 지인들로부터 손을 벌리는 어려움까지 겪으며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함봉호는 추모록을 만들 무렵 우연히 옥상 창고에서 창업주의 육필을 발견했다. 누렇게 변색된 세로 원고지에 쓴 논설 원고였다. 악필인 듯하면서도 세련된 필체를 보고 함봉호는 자칫 눈물을 흘릴 뻔했다. 묘한 감정의 충동을 맛보았던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친필이었다. 생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더욱이 창업주 추모록을 만드는 당사자로서 그 기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분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처럼 소중한 창업주의 육필 원고를 창고에 방치해 두는 회사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함봉호는 그 원고를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물론 회사에 기증할 생각도 했었지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부터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설사 그 원고를 준다 해도 놈들은 그냥 쓰레기통으로 처박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함봉호는 창업주 추모록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그는 입사한 지 1년도 안 돼 성실상을 받았다. 그 상을 받으려면 최소한 10년 정도는 돼야 가능한 것이었다. 10년이 돼도 그 상을 받지 못한 선배들로서는 함봉호가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그뿐만 아니라 현재 사장의 부친으로부터 촌지를 10만원이나 받기도 했다. 현재의 사장은 그 무렵 기획실장이었다.

촌지를 받게 된 동기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사장의 아버지는 중학교에 다니던 창업주의 은사였다. 그런 인연으로 현재 사장이 창업주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사돈 관계가 된 것이었다.

그 당시 함봉호는 사장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내온 원고에는 창업주의 중학교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 속 인물들의 실명이 부정확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이름을 적은 것이 좌우가 분명하지 않았다. 사진을 놓고 볼 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좌우가 뒤바뀌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 탓이다.

더욱이 그 오류는 인쇄소에서 마지막 교정을 보다 잡아낸 것이어서 시간이 촉박했다. 화급을 다투는 터라 함봉호는 사장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전화번호를 수소문한 끝에 전화했다. 그러자 사장의 부친은 다짜고짜 회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소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진의 잘못을 확인한 그는 잘 지적했다고 칭찬하고는, 추모록이 나오면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방문해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마침내 추모록이 발간되어 함봉호는 책을 사장의 부친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자리에서 1시간 동안이나 대화도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그 당시 막 태동된 노동조합에 대한 의견이었다. 함봉호는 신입사원답게 노조에 대한 거부 반응을 표시했고, 사장의 부친도 그와 똑같은 의견을 개진했다.

대화가 끝난 다음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그가 언제 준비했는지 조그만 봉투를 쥐어 주었다. 함봉호는 뜻밖의 촌지를 의례적으로 사양했다. 그러나 ‘어른이 주면 받아야 한다’는 압력으로 끝내 받고 말았다. 그 봉투에는 꼬깃꼬깃 접은 10만원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돈은 회사에 입사한 이후 처음 받아보는 촌지였다.

함봉호는 뜻밖의 일로 점수를 듬뿍 받은 셈이다. 그것이 당시 기획실장이던 사장의 귀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자가 만난 사석에서 한번쯤은 함봉호를 거론했을 법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달표 부장이 그것을 알고 자신이 직접 책을 가져다준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하지만 함봉호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오라고 했다며 모처럼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았다. 물론 홍달표가 가져가도 무방했지만 그런 그가 미웠기 때문이다. 그는 사장을 만날 경우 허리를 120° 구부리는 전형적인 모사(謀士)였다. 결국 함봉호는 그 일로 자신의 직속 부자인 홍달표에게 찍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가 사장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그는 천재일우를 놓친 데 대한 분풀이를 함봉호에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음을 잘 알 거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옹졸한 짓거리가 함봉호를 통해 사장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짐작했을 터이다.

함봉호는 그런 식으로 은연중 단추를 잘못 꿰기 시작했다. 이병채 상무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장의 아버지로부터 촌지까지 받고, 남들이 10년 걸리는 상을 단숨에 받고, 사보 창간과 창업주 추모록 작업까지 맡는 등 함봉호는 이래저래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런 관계로 자연스럽게 적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군대에서 숱하게 들었던 ‘중간만 가라’는 개똥철학을 무시한 채.

택시는 어느덧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뒤에서 미행하는 것도 모른 채 택시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마치 연인처럼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 자세이다.

“어디 흥신소 직원이십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모범운전수가 모범적이지 못한 질문을 한다.

“하핫,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그럼 표적이 여자 분인가 보죠?”

“아니요. 두 사람 다요.”

“허, 참…. 서툰 것을 보니, 두 사람 다 초보자군요. 바람을 많이 피워 보지 못한….”

운전수는 백밀러에 얼굴을 박고 웃는다.

함봉호는 재치 있는 운전수의 말을 듣고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다.

“저 앞 사람들이 바람을 많이 피워 보지 못했다구요?”

“하핫, 안 그런가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지요?”

“뒤에서 미행하는 줄도 모르고 마냥 태연한 것이….”

“우리가 뒤따르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앞 택시 기사는 우리가 미행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네?”

“그런데도 손님에게 귀띔하지 않는다는 건 한마디로 눈꼴사납다는 거죠.”

“아하….”

“뒷자리에서 지나치게 애정 표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기분 나쁘죠. 마치 자기네 안방에서 놀 듯 지랄하는 꼴이란, 정말 눈뜨고 못 봐 줄 정도죠.”

“아, 그래서 모르는 척한다구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함봉호는 운전기사의 그럴 듯한 추리에 감복해 곧추 쓸쓸한 웃음을 흘린다.

그때 앞서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강남의 한 호텔에서 멈춘다. 박철수와 여향미는 택시에서 내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호텔로 들어간다. 좀은 빠른 잰걸음이다. 누군가 훔쳐보지나 않을까 하고 확인한 이후이다.

“어? 목적지가 바로 저 호텔이었군요.”

운전기사가 택시를 급정거한다.

“네, 고맙습니다. 잔돈은 됐습니다.”

함봉호는 1만원을 내밀고 택시에서 내린다.

함봉호는 재빨리 호텔로 뒤따라 들어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프런트에도 없다. 그렇다면 벌써 예약을 해두었다는 얘기이다. 함봉호는 금세 허망해진다.

함봉호는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해진 것을 알고 곧장 포기한다. 일류급 사람들만 모이는 호텔인만큼 그들의 상판대기라도 구경할 요량으로 커피숍으로 향한다. 물론 커피는 마시지 않을 생각이다. 도대체 커피 한잔에 만원이 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미끈하게 잘 빠진 호텔 여종업원이 그의 앞을 지나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비싼 커피값도 사실 알고 보면 저 몸매와 연관이 있을 듯싶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념은 함봉호만의 특허다.

바로 그때였다.

“어, 여긴 웬일인가?”

박철수 실장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서….”

함봉호는 놀란 나머지 비명을 간신히 참아내고 고개를 최대한 조아린다.

그와 함께 재빨리 주위를 살펴본다. 다행히 여향미는 박철수의 옆에 없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있다면 그야말로 난처한 일이다. 어차피 두 사람의 관계를 함봉호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면 그것만큼 치명적인 실수는 없을 터이다.

“뭘 그리 놀라는가? 뭐, 못 볼 사람이라도 봤나?”

“아, 아닙니다. 이런 데서 갑자기 실장님을 뵙고…. 회사에서도 잘 뵙지 못하는데요.”

“그래, 누굴 만나러 왔나?”

“네, 저희들은 가끔 이런 데서 취재원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 진작에 만나 일을 보고 방금 헤어졌습니다.”

“음, 그래? 수고 많군. 밤늦은 시간에도….”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함봉호는 도망치다시피 호텔 커피숍을 빠져나온다.

어디로 갔을까. 여향미는 어디로 숨은 것일까. 이미 호텔 객실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있을까. 박철수는 이미 속내를 알아챈 것이 아닐까.

함봉호는 정신이 혼란스러워 한동안 어지럼증까지 맛본다. 충무로보다 더 짧은 치마의 젊은 여자들이 그것을 더욱 부채질한다. 부나비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반겨 주지 않는다. 그저 한 줄기 바람에 불과하다.

함봉호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택시를 잡아탄다. 요지경과는 거리가 먼 강북으로 달릴 것이다. 아내와 딸이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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