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유미리도 덩달아 따라 웃으며 손바닥으로 구본하의 넓적다리를 때린다. 구본하는 그대로 잠시 머물고 있는 유미리의 손목을 움켜잡는다. 친한 척이나 친해지고 싶다는 신호이리라.

“역시 유미리 씨는 손이 참 예쁘네요.”

“어머, 아직도 총각이라서 그런지 손이 참 부드럽네요. 남자 손 같지 않게….”

“어? 제가 총각이란 걸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좀 창피한데요?”

“뭐가요? 요즘 결혼 안 하는 게 뭐, 그리 큰 화젯거리도 아닌데요.”

“나이가 마흔 넘은 놈이 무슨 노총각입니까? 차라리 중닭이라 부르는 것이 낫지.”

“어머, 자신을 그렇게까지 학대할 필요는 없어요.”

유미리는 그제야 슬며시 구본하의 손아귀에서 손을 뺀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 여태 장가를 못 가셨어요?”

“유미리 씨 같은 미인을 만나려구요.”

“어머머, 농담도 잘 하셔.”

“저 같은 놈은 유미리 씨와 같은 미인과 결혼하면 안 되나요?”

“호호홋,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닌데….”

“아,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

유미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뜬다. 뜻밖의 강적을 만난 표정이다.

“그럼 제가 정식으로 프러포즈하지요. 저랑 결혼을 전제 조건으로 사귀지 않으시겠습니까?”

“…….”

유미리는 예상치 않았던 구본하의 공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입술 사이로 언뜻 비치는 고혹적인 혀가 살인적이다. 구본하는 잠시 착각에 빠진다. 조만간 저 놈의 혀를 자신의 입술로 옭아맬 날이 올 것이라고.

“구 기자님, 술 취하셨어요? 농담도 잘 하셔.”

“아, 아니요. 술 취해 하는 말이 아닌데….”

“호호홋, 그래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프러포즈에 금방 답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하이고, 감사합니다. 오늘 술값은 제가 쏠게요.”

“호호홋!”

유미리는 변신의 천재답게 여우같이 웃는다.

함봉호는 다 듣고 있으면서도 못 들은 척하며 딴짓을 한다. 그네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소가 터져나올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저히 그들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7번 손님! 다음 노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준비하십시오. 오늘도 저희 스탠드바를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때 무대 위의 밴드 마스터가 구본하를 찾는다.

“네, 알았습니다.”

구본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무대로 달려 나간다.

바로 그 순간 구본하는 갑자기 기우뚱거리며 넘어진다. 겨우 다섯 걸음만 걸으면 무대에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인데, 그런 데서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진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술을 그런 대로 제법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비틀거릴 만큼 취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실수로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뿐이다.

밴드 마스터도 당황해 음악 소리를 죽이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유미리도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함봉호는 재빨리 쫓아가 구본하를 일으킨다. 구본하는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디, 한번 들어 봐요.”

함봉호가 구본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얼굴 부위 어딘가 깨어졌는지 이미 입술 언저리가 피로 뒤범벅되어 있다.

“안 되겠네.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갑시다.”

“사장님! 빨리 택시 좀 잡아주세요.”

“피를 많이 흘려 빨리 병원에 가야 합니다.”

함봉호는 당황해 주절주절 털어놓는다.

유미리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손수건으로 구본하의 콧등을 감싸준다. 함봉호는 그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누른 채 구본하를 부축해 밖으로 나간다. 유미리도 스탠드바에서 나와 안쓰러운 마음을 표현한다.

“택시 부를 것 없이 제 차 이용하시죠? 많이 다친 것 같은데, 한시라도 빨리 가야지요.”

“아! 네, 고맙습니다.”

함봉호는 유미리의 제안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조아린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유미리가 자신의 차를 빌려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녀가 굳이 영화배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구본하가 피를 흘리는 탓에 승용차 실내가 더럽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미리의 차는 스탠드바 바로 옆 주차장에 있었다. 로드 매니저인 듯한 젊은이가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미스터 박! 이 분을 빨리 병원으로 모셔요!”

유미리가 낯선 젊은 남자에게 외치고는 앞자리에 올라탄다.

그러자 언제 나왔는지 콧수염이 유미리가 탄 차창 너머로 고개를 들이민다.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요. 오늘은 이만! 여기 환자가 더 급하니까….”

유미리가 콧수염을 매몰차게 외면한다.

“빨리 타지 않고 뭐하고 있어요!?”

유미리가 이번에는 함봉호를 질책한다.

“아, 네!”

함봉호는 가까스로 대답하고 구본하를 뒷자리에 태운다.

함봉호는 뭔가 홀린 기분이다. 잠시 정신까지 어찔해지면서 순식간에 혼선이 오고간다.

두 사람이 타자 차는 곧장 출발한다. 실내에서 퍼지는 진한 향수가 코를 찌른다. 함봉호는 유미리의 뒷모습을 보고는 문득 후회를 한다. 좀 전에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엉뚱하게 구본하가 뒤집어쓴 것이 아닌가 싶은 탓이다. 뜻밖으로 고운 마음씨를 가진 유미리가 새삼 아름다워 보인다.

병원은 바로 지척간에 있었다. 서울의 한복판인 탓에 충무로 인근에는 종합병원이 다섯 군데가 넘는다. 하지만 의외로 환자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래서 구본하는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봉합수술을 했다.

함봉호는 구본하가 수술받고 있는 동안 원무부에 가서 입원 수속을 마쳤다. 다행히 피가 많이 난 것에 비하면 상처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콧잔등이 약간 깨져 몇 바늘만 꿰매면 그뿐이었다. 유미리는 남의 눈을 의식했는지 응급실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좀 어둡고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병원 정문 뜰 앞을 거닐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을 찾은 이후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미리 조심하는 눈치이다. 함봉호가 유미리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긴장을 푼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아, 네. 다행히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았어요. 몇 바늘만 꿰매면 된다나 봐요.”

“어머, 천만다행이네요.”

“아무튼 이렇게 병원까지 빨리 올 수 있게 배려해 준 데 대해 뭐라고 고마워해야 할지….”

“아, 아니에요. 구 기자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의당 할일을 한 것뿐인데요, 뭐.”

“그래도, 영화배우이신 분이…?”

“호호, 뭘요. 영화배우는 사람 아닌가요?”

“그래도 대개의 경우….”

“저, 그만 가볼게요. 그럼….”

“저, 잠깐만요. 이건 제 명함인데…, 연락처라도 좀….”

함봉호는 명함을 내밀며 유미리의 것도 부탁한다.

그러자 유미리는 명함 대신 종이에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준다.

유미리는 글씨도 얼굴만큼이나 예쁘게 쓴다. 함봉호는 다시 혼선을 겪는다. 그와 함께 적잖은 충격이 뒤따른다. 함봉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근원 모를 모종의 자신감이 샘솟는다. 정말이지 한번쯤 사귀어 보고 싶은 여자이다.

하지만 함봉호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다만 유미리를 구본하와 엮어 주겠다는 마음뿐이다. 물론 노총각 기자와 영화배우의 만남이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점칠 만한 이유는 유미리의 나이가 어느덧 서른을 넘긴 탓이다.

“감사합니다. 오늘 은혜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겁니다. 조심해 가십시오.”

함봉호는 최대한 허리를 굽혀 조아린다.

“아, 아니에요. 그럼 다음에….”

유미리는 서둘러 차에 오른다.

지나칠 만큼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함봉호의 처신이 부담스런 모양이다.

“아, 참! 저…, 죄송하지만 저희 신문사 정문까지만 저를 태워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함봉호는 갑자기 운전수에게 다가가 부탁한다.

“아, 그래요? 무슨 일 있으신가 보죠?”

“아, 구 선배 의료보험증이 회사 책상에 있다고 하길래….”

“그래요? 그럼, 어서 타세요.”

유미리는 자신의 일처럼 그를 재촉한다.

함봉호가 올라타자 차는 병원 정문을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죄송합니다. 정신없다 보니 좌충우돌하는군요.”

“아, 경황이 없는데 당연하죠. 그래도 구 기자님이랑 무척 가까운 사이인 듯하군요. 그런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너무 좋구요.”

“아, 제 선배님입니다. 참 괜찮은 선배죠.”

“그런데, 그 분은 아직까지 결혼을 왜?”

“글쎄요. 뭐랄까…, 좀 눈이 높다 할까?”

“어머,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무슨? 콧대라고 다 콧대인가요?”

“하하핫! 할 말 없습니다.”

“어머, 혹시 일러바치는 것은 아니죠?”

“음,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러는 사이에 차는 신문사 앞에 와 멈춘다.

“오늘, 무척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또….”

“네, 구 기자에게 전해 줘요. 몸조리 잘하시라구요.”

함봉호는 유미리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헤어진다.

“어? 함 기자, 무슨 일 있나?”

경비가 밤중에 불쑥 나타난 함봉호를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은 키가 큰 경비 팀장이 근무를 하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순찰중인지 현관에 없다.

“아, 사무실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함봉호는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다. 쓸데없이 바른 말을 했다가 이상한 말 나오게 할 필요는 없다. 경비원 중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기획실장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경비 팀장이 첩자라는 얘기도 있다.

경비원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서고 함봉호가 그 뒤를 따른다. 함봉호는 경비원이 못마땅하다. 그를 믿고 열쇠 꾸러미를 주면 좋을 텐데, 굳이 함께 동행하는 꼴이 아니꼽다. 함봉호는 이 작자가 바로 그 첩자임을 직감한다.

“괜히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함봉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아, 아니요.”

경비도 건성으로 대답한다.

함봉호는 경비원과 얽힌 재미난 사건을 하나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입사한 이후 처음 맞는 숙직 근무 때의 일이다. 새벽 2시에 웬 전화가 걸려 왔다. 신문사였으므로 밤중에 전화가 온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은 함봉호는 다짜고짜 명령조로 말하는 상대방이 불쾌해 그대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더욱이 초저녁에 장난 전화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또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 전화는 당시 안기부에서 온 것이었다. 첫 번째 전화에서 화가 난 당사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편집국장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전화도 역시 장난 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는데 그때 마침 잠에서 깨어난 경비원이 물려 받았다. 함봉호로서는 그 전화가 그렇게 중요한지 알 턱이 없었다.

밤중에 안기부에서 신문사로 급전한 내용은 아침에 긴급 기자회견이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 당시 전언은 대한항공기의 폭파 범인인 김현희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급보였다. 물론 그 전화가 그렇게 중요한 사안임은 나중에 알았다.

결국 다음날 아침 함봉호는 출근하자마자 편집국장에게 호출당해 혼이 났다. 다행히 직속 상사가 아니어서 훈계 정도로 끝났다. 만약 직속 상사였다면 사표라도 써야 할 형국이었다. 그나마 관리국장이 끼어들어 신입 사원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거들어 주는 바람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물론 한낱 신입사원에 불과한 함봉호가 엵힌 사건에 관리국장이 개입해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났다는 데 묘한 여운이 남는다. 사실 이 사건은 함봉호의 배후를 둘러싼 데 모종의 권력 다툼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김현희로 인해 자칫 회사를 그만둘 뻔했던 함봉호의 그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우스갯소리로 회자되었다. 일부는 그 사건을 두고 통쾌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문사 입장에서 볼 때 안기부로부터 은연중 억압받고 있던 터에 간단히 한 방 날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안기부라면 모두 쩔쩔 매던 시절이었다. 신문사마다 담당자가 한명씩 있었다. 그런 탓에 안기부의 백으로 신문사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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