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약속 장소를 언제나 쌍화탕 냄새가 진동하는 전통 찻집을 고집하는 오빠가 못마땅했다. 오빠는 전통 찻집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차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진실 되게 한다고 습관처럼 말했다. 그때마다 임수진은 오빠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먼 옛날의 늙은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먼 옛날의 별에서 온 남자일는지 모른다.

“꼭 이런 곳에서 만나야 해?”

수진은 여느 때처럼 투덜거렸다.

“뭘 마실까?”

오빠가 딴청을 하자 수진은 코를 감쌌다.

“여긴 한방병원이야. 차 향기가 아니라 한약 냄새라고.”

수진은 코를 막은 채 말했다.

“나랑 결혼해서 살려면 다도부터 배워야 할 걸.”

오빠는 지독한 골초였다. 항상 담배를 물고 있어 별명까지 재떨이였다. 그러나 전통 찻집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전통 차의 그윽한 향기에 취하기 위해서라는 게 금연의 이유였다.

“오빠의 그 꿈, 아마 이루기 힘들 걸.”

수진은 빈정거렸다.

“왜?”

오빠가 물었다.

“난 화려하게 살 거니까.”

“화려한 생활이 어떤 건데?”

“오빠!”

수진은 앙칼지게 오빠를 불렀다.

“난 오빠의 그런 말투가 싫어. 인생을 멋지게 즐기며 살겠다는 말 좀 하면 안 돼?”

“인생의 멋은 안에서 찾는 거지, 겉치레가 아니야.”

“또 그 소리! 정말 짜증 나.”

수진은 울상을 했다. 핸드백을 챙기며 일어섰다. 무릎 위에서 찰랑거리는 검은색 무스탕을 입은 그녀는 흰색 반바지와 티셔츠에 목이 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오빠랑 또 싸우겠어. 나가.”

수진은 약이 오른 얼굴로 앞장섰다.

토요일 한낮의 거리는 따뜻했다. 겨울의 추운 맛이 없었다. 해빙기가 지난 어느 봄날 같았다. 수진은 오빠의 팔짱을 꼈다.

“화났어?”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래.”

“많이?”

“아주 많이.”

수진은 오빠의 어깨를 옆머리로 받으며 깔깔거렸다. 강남역 지하상가를 가로 질러 7번 출구로 나갔다. 거리는 젊은 인파로 붐볐다.

둘째 오빠의 친구인 최명식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다. 전문대에 입학한 후 오빠와 동생에서 이성 관계로 발전했다.

서점으로 들어갔다. 수진은 코디와 미용에 관한 책을 골랐다. 오빠는 마지못해 사 주며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책 좀 읽으라고 잔소리했다.

“오빠나 많이 읽어. 난 전문대도 죽지 못해 다닌 거 오빠가 잘 알잖아. 그런데 쇳덩어리 같은 책을 보라고?”

수진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오빠가 살짝 군밤을 먹였다. 하얀 색 털모자가 한쪽으로 쏠렸다.

“우리 시외로 나가.”

모자를 바로 쓰며 어리광을 부렸다.

“안 돼. 연극표를 사놨어.”

수진은 오빠의 연극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꼈다.

스무 살 전까지만 해도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였다. 문학, 영화, 연극 등 줄줄이 꿰어 얘기할 때 오빠는 환상적인 남자였다. 오빠와 결혼하면 평생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가지면서 이 믿음이 빠르게 깨졌다. 오빠를 바라보는 눈이 회의적으로 바뀌어갔다. 최근에는 오빠와의 결혼이 심각한 고민거리가 됐다. 그와의 잠자리도 조금씩 거북해졌다.

오빠는 정적인 사람이었다. 컴퓨터 시대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화훼농원에서 난과 분재 재배를 익히고 있었다. 수진은 그런 오빠의 모습에서 불안을 느꼈다. 그와의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마음에 금이 갔다. 초현대식 아파트에서 화려하게 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이 무참히 깨지는 환상에 빠지곤 했다.

“연극……다음에 보면 안 돼?”

수진은 침울하게 말했다.

“연극부터 보자. 그리고 시외로 나가자.”

수진은 고무풍선의 바람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늘까지만 오빠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연극은 재미없었다. 그러나 오빠는 아니었다. 한 달 만에 보는 연극이라고 귓속말을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수진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오빠와의 문제를 생각했다. 오빠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주부로. 아이 엄마로 살게 할 것이다. 외식을 해도 고작 돼지갈비에 냉면 따위이리라.

난 유럽풍 레스토랑에서 세계의 온갖 별미를 즐기며 음악을 들어야 한다. 해외여행을 해도 최고급 호텔에서 아침을 맞아야 한다. 특급 호텔의 커피숍에서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연극도 프랑스에서 보아야 한다. 세계의 유명한 성악가들이 수십 명씩 출연하는 오페라를 보며 살아야 한다.

“어때? 재미있었지?”

막이 내리자 오빠가 신나게 손뼉을 치며 물었다.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 극장에서 시시껄렁한 연극에 흥분한 오빠가 저능아처럼 느껴졌다.

오빠는 렌터카 이용을 반대하다가 겨우 승낙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니?”

말없이 운전하던 오빠가 볼 멘 소리를 했다. 차는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강가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자.”

수진은 가볍게 말했다.

“이제 화 풀렸니?”

“오빠 마음 편하게 생각해.”

수진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아려오는 가슴을 달랬다.

그녀는 저녁만 먹고 서울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바꿨다. 오빠는 첫사랑이자 스무 살 전에 받아들인 첫 남자였다. 매몰차게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었다. 오늘 밤, 강가의 호텔에서 첫사랑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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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