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박창세는 총무부 인사 담당자이다. 비록 그가 인사 실권자는 아니지만 그의 영향력이 박철수 실장에게 어느 정도 통하는 편이다. 그는 인사 철이면 진급자 명단을 상부에 올리는 일을 도맡아 한다. 게다가 놈은 영화배우 뺨치는 얼굴을 가진 데다 키도 훤칠하게 컸다. 굳이 인사와 관계가 없더라도 여자라면 한번쯤 넘볼 만한 미남자였다.

“그래요? 박창세가 바람둥이라구요?”

함봉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묻는다.

“그렇다고 하더군. 나도 들어서 아는데, 하여간 여자 꼬시는 데는 도가 튼 난봉꾼이라더군.”

“캬, 그래요?”

“원래는 이 식당으로 들어오려다 우리를 발견하고 재빨리 도망친 거라구. 뭔가 켕기는 것이 있기에 저리 황급하게 도망치지. 안 그런가?”

“이리로 들어오려다 나간 거라구요?”

“그렇다니까.”

“그럼 뭔가 있기는 있나 보군요. 우리도 잘 아는 사인데 굳이 피한다는 것이….”

“허 참, 괜히 열받네. 별 거 아닌 것이….”

구본하는 혀를 끌끌 찬다.

조아라의 고향은 대전으로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그리 예쁜 편은 아니지만 몸매 하나는 그런 대로 잘 빠진 편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23살의 나이로 좀은 빠르게 사회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가끔은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여기자들처럼 계약직 사원이었다. 조아라도 처음 입사할 때는 남자들과의 임금 차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남자들과의 벽을 실감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회사의 규칙을 손쉽게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야, 저 자식이 우리 조아라 건드리는 거 아냐?”

구본하는 화제를 엉뚱한 데로 돌린다.

“설마….”

함봉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둘둘 만다.

“알 수 없지. 저 자식이 워낙 음흉한 놈이라서….”

“그래도 그렇지요. 유부남인 데다 소문이 금방 퍼지는 회사인데….”

“허헛, 유부남이라고 처녀 건드리지 말라는 법 있나? 더 날뛰는 게 요즘 유부남들인데…. 우리 함 기자라면 몰라도 말야.”

“카카칵…. 나도 유부남이지만 정작 나 자신도 그것만큼은 신뢰할 수 없지요.”

“하하핫! 솔직해서 좋네. 이 세상은 뒤에서 호박씨 까는 놈들이 더 많은 법인데….”

“그나저나 구 선배는 왜 여태껏 장가를 안 가는 겁니까?”

“바람피우는 게 좋아서….”

“에이, 그러다 벌 받아요.”

“여자 울리면 벌은 누가 내린담?”

“그야 당연히 하나님이겠지요.”

“에이, 하나님도 사랑을 한번 해보라고 해. 하나님도 바보가 될 테니까….”

“캬! 하나님도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 정말 멋진 말이네요. 구 선배도 어떨 때 보면 시인 뺨친다니까.”

“그나저나 어디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줘.”

“하이고, 바람피우는 것이 좋아 결혼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소개해 줍니까? 뺨 석 대 맞을 일 있나요?”

“에이, 그건 농담이지. 그래도 이제는 정말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참, 구 선배도…. 멀리서 찾지 말고 곁에서 한번 찾아 봐요.”

“어디 쓸 만한 애가 있는감?”

“박승례도 그만하면 괜찮고, 조아라도 잘 빠졌잖아요.”

“에이, 박승례는 가슴만 커 가지고…. 가슴 큰 애들은 좀 미련하다고 하던데….”

“허헛, 그런 말을 믿어요? 박승례가 어디 미련합니까?”

“좀 미련한 편 아닌가?”

“에이, 박승례 정도면 똑똑하지요. 정, 그렇다면 조아라도 괜찮지 않아요?”

“이미 저 자식이 벌써 저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데, 내 차지까지 올까?”

“에이, 먼저 올라타는 게 임자죠. 임자가 따로 있나요?”

“허헛, 역시 유부남이라 경험자의 말은 다르군.”

“조아라 정도면 괜찮지요. 이름처럼 고운 피부를 가진 데다 몸매도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캬! 함 기자도 관찰력이 대단해.”

“그 정도는 기본 아닙니까? 아무튼 먼 데서 찾지 말고 한번 잘해 봐요.”

“자, 그만 나가자구. 입가심으로 호프나 한잔 더하자구.”

“전 그만 갈랍니다. 마누라도 기다리고….”

“어허, 마누라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 수 있나? 에이, 딱 한잔만 하자구.”

“그래요, 딱 한잔만입니다.”

“하하핫!”

두 사람은 한소끔의 웃음을 토해내고 밖으로 나왔다.

충무로의 밤거리는 이미 건하게 취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충무로의 밤거리는 묘하게 흥청거린다. 얼핏 보면 다른 거리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남모르는 이질성이 감추어져 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엄연히 계급의 차이가 있다.

충무로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로 기묘하게 맞물려 살아간다. 영화사, 인쇄소, 오토바이 판매점, 애견센터 등이 특화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 술집에서도 사람들을 잘 관찰하면 어딘지 모르게 표가 난다. 그것은 일종의 신분 차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지만 그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없다.

“자, 나를 따라오라구. 이차는 내가 쏠 테니까.”

구본하가 의기양양하게 앞장선다.

함봉호는 마지못해 구본하의 뒤를 따른다. 그는 웬만하면 적당히 마시다가 도망치리라 마음먹는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덩달아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내일 일이 지장받을 거였다.

구본하는 혼자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셨는데도 여전히 멀쩡하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구본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회사에서 가장 술이 세다고 자아자찬을 한다. 함봉호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최정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공무국이나 판매국의 무지막지한 술꾼들과 언제 한번 대적한 적이 없는 탓이다. 물론 그가 그 정도로 미련한 사람은 아니다.

구본하가 들어선 곳은 엉뚱하게도 「흑백 스탠드바」였다. 한동안 꽤나 유행했던 스탠드바이지만 요즘은 보기 드문 술집이다. 밴드 마스터가 노래 장단을 맞춰 주는 술집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술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에 스탠드바를 찾던 손님들이 노래방으로 옮겨 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집은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잘되는 편이다. 그나마 향수에 젖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으레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아, 아니…, 여기는 왜요?”

함봉호가 들어서려다 말고 구본하를 붙잡는다.

“괜찮아.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그냥 따라오기나 해.”

구본하는 못 들은 체하며 술집 안으로 들어선다.

“아따, 구 선배는!? 호프 한잔만 하기로 하고….”

함봉호가 귀찮게 따라가면서 투덜거리지만 막무가내다.

물론 이 술집은 그 전에 부원들과 몇 번 와보았던 곳이다. 전임 부장이 있을 때는 제법 즐겨 찾던 집이다. 그런 반면 이한무 부장은 이런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기는 구본하가 이 곳을 가끔이나마 애용하는 것은 그런 부장 탓도 있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영화배우들이 옛 추억을 잊지 못해 자주 들른다는 것이다. 물론 일류급 배우들은 당연히 아니다. 대개가 삼류나 이류급들이다. 이 술집을 즐겨 찾는 배우들 중에는 1960~70년대의 액션 영화에 출연했던 낯익은 남우들이 꽤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 퇴물들이다. 그런데도 충무로로 꾸역꾸역 나오는 것은 일종의 습관에 의한 회귀 본능일 따름이다.

구본하는 그가 늘 가는 단골 아줌마한테 가 앉는다. 중앙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7번 코너로 주인 여자가 맡고 있는 곳이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왜 그동안 그렇게 뜸했어?”

주인 여자인 미세스 박이 예의 친근한 표시를 한껏 낸다.

이쯤 되면 함봉호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가 잘 아는 주인 여자한테 밉보일 필요는 없다. 재미있는 것은 미세스 박이 이병채 상무의 국민학교 동창생이라는 점이다. 그 사실은 나중에 우연히 알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구본하는 이병채 상무가 7번 코너에 자주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 상무와 함봉호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도움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두 동창이 이상한 관계는 아니다. 다만 미세스 박으로서는 신문사 간부로 재직 중인 이 상무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새삼스러울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이 상무는 주변의 지인들을 이 곳으로 잘 안내했다. 그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주 찾아왔다.

“함 기자는 어디 좋은 데 다녀왔다며?”

주인 여자가 이번에는 함봉호에게 애교를 떤다.

“어떻게 그걸 알아요?”

구본하가 이상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본다.

“하이고, 내가 신문사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것이 어디 있어? 척하면 삼천리지.”

“아하, 이 상무님한테 들었군요.”

“어머머, 구 기자는 내가 어디 이 상무만 아는 줄 착각하나 봐? 우리 술집은 전부서 사람들이 다 오는 데야. 편집뿐 아니라 광고, 판매, 출판, 공무국 등 모두 다….”

“하하, 그렇군요?”

구본하는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인다.

“어이구, 오늘 또 괜히, 이 상무님 오시는 거 아니죠?”

이번에는 함봉호가 불쑥 끼어든다.

점심 때 식사를 같이 하고 또 만나는 것이 아닌지 괜히 불안해진 탓이다. 사실 마음 같으면 이대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려면 아예 처음부터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분명히 이 상무의 귀에 들어갈 터이다. 그것이 비록 일종의 고자질이지만 미세스 박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다.

아무개 직원이, 그것도 이 상무와 친한 놈이 공짜 술도 안 먹고 나갔다고….

아무튼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이므로 그대로 짓눌러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병채 상무가 오든 박철수 실장이 오든 누구도 겁나지 않는다. 어차피 퇴근 이후의 시간은 개인적인 자유이므로 누가 시비를 걸 수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부질없이 오금만 저릴 뿐이다.

함봉호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출입문 쪽을 응시한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눈에 익은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어? 저 여자, 영화배우 아닙니까?”

함봉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구본하에게 묻는다.

“응, 맞네. 웬일일까?”

“누구지요?!”

“영화배우 유미리야.”

“아, 가끔씩 찐한 영화에 잘 나오는 여자요?”

“맞아. 일류급은 아니지만, 요즘 그런 대로 잘 나가는 편이지.”

“그런데, 저 옆의 콧수염은 누굽니까? 매니저인가요? 좀 기분 나쁘게 생겼네.”

“글쎄, 새로 생긴 애인인가? 아니면 매니저인지…, 나도 처음 보네.”

“야, 역시 잘 빠졌는데요.”

“내가 언제 한번 소개시켜 줄까?”

“네!? 구 선배가 저 여자를 압니까? 그림의 떡이죠, 뭐.”

“그럼, 알다 마다…. 영화 제작 발표회와 시사회 때 가끔 봐서 조금 알지.”

구본하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말한다.

함봉호는 구본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발견한다. 좀은 으쓱거릴 정도이다. 함봉호는 잘 알고 있다. 구본하가 영화 담당 기자인 만큼 웬만한 풋내기 영화배우들을 당연히 알고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게다가 구본하는 넉살도 좋아 영화가를 잘 돌아치는 편이었다.

“에이, 농담으로 말했는데…. 저런 여자가 감히 나 같은 놈, 쳐다보기나 하겠습니까?”

“허허,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지.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지 않은가?”

“그래요?”

“후훗, 함 기자는 막상 소개시켜 줘도 못할 걸?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아 줘도….”

“…….”

함봉호는 금세 말문이 막힌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누워서 떡 먹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놈 아닌가. 그런데, 더구나 영화 속에서 야하게 옷 벗는 여자를 감히….

함봉호는 자신을 사정없이 질책한다. 적당히 비웃는 구본하의 말이 유리 까팡이 같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에 맥주와 마른안주가 나왔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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