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사실 이런 비밀스런 사안은 밖에서 함부로 말할 처지의 것이 못 되었다. 어찌 보면 특급 기밀일 수도 있는 탓이다. 물론 조만간 세상에 알려져 떠들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에 따른 충격은 이 사건과 연관된 당사자들만 느낄 가능성이 많다. 그와 무관한 사람들은 한낱 별 볼 일없는 단순 사고로 여길 것이다.

함봉호는 이 상무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한다. 아무리 그가 나이 지긋한 유명인사라고 하더라도 감정 관리가 마냥 쉽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 상무는 그 이후 식사 시간 내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함봉호로부터 사건 전후 사정을 파악한 이후 그의 심기가 급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함봉호는 두 잔의 술을 비운 반면 이 상무는 네 잔이나 마셨다. 함봉호는 자리를 의식해 조심스럽게 술잔을 꺾은 데 반해 이 상무는 그렇지 않았다. 함봉호는 이 상무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불같은 성질대로라면 출판국을 한바탕 엎어놓고 싶었을 터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위치나 체면 때문에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만약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면 자칫 개인사적인 문제로 오인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판 담당 이사로서 사전에 미리 막지 못하고 사후에 반응한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었다.

“치앙마이 기사를 객관적으로 쓰게. 있는 그대로 쓰라는 뜻이야. 물론 자네가 본 것이 틀림없겠지만 함부로 주관적인 의견을 달지 말도록…. 어차피 치앙마이 여행 사업은 백지화되었지만, 이미 찍은 책을 회수한다거나 절판할 수는 없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상무는 함봉호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그 나름대로 엔간찮게 고민을 한 후의 결정이었다. 분명히 치앙마이 사건이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액면 그대로 까발릴 수 없는 입장임을 은연중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이 상무와 함봉호만의 보이지 않는 거래였다. 두 사람은 이번 사고를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연결된 탓이다.

조수미의 남편이 사망한 원인은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전해졌다. 조수미가 이한무 부장에게 국제전화로 알려온 것이다. 그녀가 이한무에게 소식을 전한 것은 순전히 특집 기사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다음 호에 맡은 원고를 쓸 형편이 못 되었다. 아니 그녀가 앞으로 더 이상 주간지에 특집 기사를 실을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주간지 객원기자를 그만두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듯하다. 남편의 생명을 앗아간 원수들이 우글거리는 데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을 거였다.

이한무는 퇴근 준비를 하던 부원들을 급작스럽게 소회의실로 소집했다. 조수미 남편 사고로 인한 대책회의였다.

“방금 전에 조수미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조 기자 남편의 죽음은 총기에 의한 사고사가 아니라 말라리아에 의한 급성 열병 때문이다. 어쨌든 안된 일이지만, 우리 모두 조 기자 남편의 명복을 빌어주자.”

이한무가 특유의 어법으로 심각한 척하며 적당히 한숨을 섞어 말한다.

부원들도 얼굴이 침울하다. 조수미와 가깝게 지냈던 박승례와 조아라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다.

“혹시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무슨 이상한 전화라도 오면 아예 대꾸하지 말고 나에게 돌려주기 바란다. 특히 함봉호는 입 조심하고….”

이한무는 예상했던 대로 함봉호를 의식한다.

‘짜식, 지가 무슨 책임이 있는 것처럼 까부네.’

구본하는 속으로 이한무를 욕한 박승례도 알 듯 말 듯 입술을 삐죽거린다. 그녀도 뭔가 못마땅하다는 뜻이다.

다.

“자, 그건 그렇고 조수미가 쓰기로 했던 특집 기사를 누가 쓸까?”

이한무가 본론을 꺼낸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기자들은 자신의 일이 많은 데 대한 부담으로 웬만하면 일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러기에 당연히 과중한 업무를 떠맡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특집 기사는 함봉호가 쓰는 것이 어때? 그동안 해외여행도 다녀왔는데….”

“네?!”

“뭘 그렇게 놀라나? 특집 기사 하루 이틀 써보나?”

“이번 호 특집 주제도 모르는데요?”

“가르쳐 주면 되잖아.”

“…….”

“구본하! 뭘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줘라.”

“알았습니다. 둘이 상의해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구본하에게 화살을 돌리자 그가 마지못해 대답한다.

“자, 이상 회의 끝!”

이한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데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굼뜬 목소리로 종지부를 찍는다.

이한무가 소회의실을 나가자 부원들이 술렁인다. 함봉호의 입이 한 바가지 삐죽 나와 있다.

“회의는 무슨 회의?”

조아라가 입술을 비튼다.

“함 선배, 이해하세요. 또 그놈의 질투가 발동했어요. 내가 나중에 술 한잔 살게요.”

“오늘 사면 안 될까?”

박승례가 함봉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었는데 구본하가 대뜸 끼어든다.

“어머머…, 내가 언제 구 선배한테 술 산다고 했나? 오늘은 약속 있어서 안 돼요.”

“허헛, 처녀가 유부남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

“구 선배!!”

박승례가 구본하에게 다가가 팔뚝을 꼬집는다.

“자, 우리 이제 퇴근하고 나가 한잔하자구.”

구본하가 함봉호의 어깨를 두드린다.

함봉호는 새삼스럽게 이곳이 한국, 그 중에서도 수도 서울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하루빨리 태국의 추억은 잊어야 한다고 자신을 책망한다.

쓸데없이 케케묵은 과거를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 다 못 쓴 치앙마이 기사는 내일 마치면 그뿐이다.

함봉호는 마음을 가볍게 먹자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그는 약속대로 구본하와 함께 소주 한잔 하려고 인근의 유명한 「충무로 돼지갈비집」으로 갔다. 인사성 밝은 주인 남자가 구본하를 알아 보고 반가운 인사를 한다.

“아,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아, 네. 잘 되시죠?”

“그럼요, 잘되다 말다요. 구 기자님 덕분에 나날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식당 주인은 여전히 구본하에게 깍듯이 잘한다.

이 술집은 구본하가 자주 이용하는 편안한 집이었다. 이 집은 구본하가 주간지를 창간할 무렵 ‘맛있는 집’으로 취재를 해준 식당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집이 그 당시에 이미 일본의 유수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각 능력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일본인들이 이미 섭렵한 후였다. 하지만 그런 식당 주인도 국내 주간지 중 최초로 소개해 준 데 대해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더구나 식당과 가까운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에 소개해 주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우선 「충무로 돼지갈비집」은 소스가 특이했다. 돼지갈비를 찍어먹는 이 집의 소스에는 남들이 모르는 특유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 또한 고기를 무치는 데 드는 양념에도 이들만의 노하우가 감춰져 있다. 사실 식당마다 각기 자기들만이 최고 육질의 고기를 쓴다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고기는 거의 다 똑같은데 다만 신선도에서 차이가 좀 날 따름이다.

구본하와 함봉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앉자마자 석쇠를 깔고 소주와 기본 반찬이 나온다. 곧이어 2인분의 돼지갈비가 자동으로 준비된다. 오로지 돼지갈비뿐이므로 손님에게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돼지갈비를 원치 않은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 그건 그렇고 조수미가 맡은 특집이 뭡니까?”

함봉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묻는다.

“허허, 참…. 묘하게 됐네 그려.”

구본하는 대답 대신에 안쓰런 마음을 표시한다.

“까라면 까야죠, 뭐.”

“하여간 이한무는 참 묘한 사람이야. 아, 그래…? 해외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특집을 맡긴다는 꼴이….”

“하하핫, 괜찮습니다. 미운 털이 박힌 놈인데, 뭘?”

“그래도 그렇지. 계집애들한테 시키면 더 잘할 것을….”

“에이, 그래도…. 가시내들이 자기들 일도 벅찬데 그걸 맡겠습니까? 자, 한잔 드시죠.”

함봉호는 그쯤에서 술잔을 한잔 비운다. 화가 단단히 났지만 부아를 삭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구본하에게 속내를 액면 그대로 드러낼 처지도 못 된다. 아무리 친한 동료이라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나마 두 사람은 그런 격식을 차리지 않는 편이지만, 언제부터인가 함봉호는 선배인 구본하에게 좀은 미안한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후배인 자신이 알게 모르게 선배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구본하도 마지못해 술잔을 비우고 말을 잇는다.

“이번에 조수미가 맡았던 기사는 혼수 특집이야.”

“네? 그 어려운 것을?”

“글쎄, 조수미와 한번 통화하면 한결 수월할 텐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경황이 있을까요?”

“그럴까? 그렇다면, 혼자 다시 취재해 써야 한다는 얘긴데…. 좀 힘들겠군.”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조수미 입장이라면 두 번 다시 우리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기는…, 그렇겠군.”

“그나저나 참 서글픈 운명이군요.”

함봉호는 말을 뭉툭 잘라먹고 다시 술을 한잔 들이킨다.

그와 함께 돼지갈비도 게걸스럽게 한 입 베어 먹는다.

“무엇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여자가 다시 혼수 특집을 맡음과 동시에 남편을 잃었으니까요.”

“참, 그러고 보니 정말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나 잔인하군. 정말 안됐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를 겁니다. 이런 사건을 그대로 은폐하는 데 급급한 우리 회사 사람들도 문제입니다만….”

“허, 우리 회사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잘 되면 나서고, 안 되면 꼬리를 감추는….”

“하지만….”

“자, 술이나 마시자고! 고기 다 타겠다.”

“…….”

구본하가 술잔을 함봉호의 것에 들이댄다. 입을 맞추자는 뜻이다. 함봉호는 구본하의 것에 입술을 들이댄다. 건배란 키스처럼 좋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치앙마이의 고산족들이 우리 고구려 민족의 후예가 맞던가?”

“아니, 구 선배는 그걸 아직도 진짜로 믿고 있었습니까?”

“허허, 꼭 믿는다기보다는 그래도 어딘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구 선배니까 솔직히 말하는데요. 차라리 치앙마이 여행 사업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 오히려 잘된 겁니다.”

“그 정도인가?”

“김 박사 사무실에 갔더니 그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그래선지 우리가 사무실에 찾아가자 좀 당황하더군요.”

“여행사를?”

“네.”

“그래서 책표지에다 친절하게 전화번호까지 기재했구나. 사람들이 책을 보고 찾아오라고….”

“실제로 그걸 보고 치앙마이 현지에 다녀온 사람들이 있더군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고….”

“아하, 그 사람이 바로 그걸 노린 거구나. 거 참, 기가 막히군.”

“결국 우리 회사는 그에게 농락당한 셈이지요.”

“그렇군. 햐…, 술맛 당기는군.”

구본하는 홧김에 술을 연거푸 들이킨다.

어느덧 함봉호는 술이 제법 올라 얼굴이 발갛다. 술이 약한 탓이다. 그런 반면 구본하는 술이 센 편이어서 아직 표시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책 표지에 나오는 소녀랑 함께 기거하더군요.”

“그 십팔세 소녀, 나미 말인가?”

“네.”

“어매, 어찌 그런 일이…?”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무튼 같이 산다는 자체가 그걸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태국에서 한달에 30만원 정도면 젊은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것이 정말 맞는 말인가?”

“네,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돈만 있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하기는 남자란 늙으나 젊으나 다 똑같으니까…. 그 사람도 타국 땅에서 혼자 살기가 적적할 텐데, 그 정도 일탈은 당연히 해볼 만하지.”

“하하핫!”

함봉호는 어색한 분위기를 웃음으로 때운다.

“하기는 가난에 찌든 고산족 소녀들이야 돈만 주면 얼마든지 데리고 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요.”

“참, 어이가 없군. 앞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를 잡아먹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활개 치는 그가 정말….”

“에이,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이젠 그 사람 얘기만 해도 지겨워요.”

“그럴까? 어!? 저게 누구야?”

그때였다. 구본하가 창밖을 바라다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함봉호도 재빨리 창밖을 응시한다. 조아라가 어떤 남자랑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남자는 조아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총무부에 근무하는 박창세였다.

“어쭈!? 저 놈이 언제 우리 조아라를 꼬셨대야? 저 자식,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구본하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비웃는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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