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토요일 오후, 손님이 없었다.
주간에는 커피도 파는 카페 작은 고추의 분위기는 아늑했다. 여느 카페처럼 요란한 장식도, 화려한 치장도 없지만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주미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커튼을 살짝 걷고 밖을 내다봤다. 주말 오후의 거리는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조차 산책하듯 여유로웠다.

넌 짜증스러운 여자야.

주미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무슨 얘기 끝인가, 인섭 오빠가 화를 냈다. 그때 인섭 오빠는 샤워 후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 난 피곤한 여자 질색이야.

주미는 호텔 룸을 나가는 그를 붙들지 못했다. 그가 워낙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붙잡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동안 너 때문에 속 썩은 거 생각하면 끔찍해. 어쩌다 너 같은 계집애를 좋아했는지 모르겠어.

주미는 호텔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의 모멸 찬 말들을 곰씹으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함께 들어왔던 호텔 롬을 박차고 나갈 만큼 잘못한 게 없었다.

“일찍 왔구나. 차 마셨니?”

작은 고추의 카페 주인이자 학교 선배인 인숙 언니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주미는 인숙 언니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왜 날 만나자고 했어? 빨리 얘기해 봐.”

인숙 언니의 성격은 급했다. 무슨 일이든 즉석에서 해치워야 속이 풀리는 여자였다.

“인섭씨가 날더러 짜증스러운 여자라며 헤어지재.”

주미는 간밤의 일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정말로 헤어지자고 했니?”

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헤어져.”

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흔한 게 남자야. 니 나이에 뭐가 아쉽다고 한 사람에게 매달려? 맹추 짓거리 그만 해.”

“언니! 헤어지는 건 쉬워요. 문제는 내가 왜 짜증스러운 여자냐 이거죠.”

주미는 세상 어떤 여자와 견주어도 자신 있었다. 섹시한 미모에다 낭랑한 말솜씨, 학력에 이르기까지 빠질게 하나도 없었다. 있다면 부모가 권력과 재력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인섭 오빠는 행운아였다. 주미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남자들이 어쩌지 못해 마른침만 삼켰는데 그는 아니었다. 주미 스스로 접근했고 서둘러 옷을 벗었다. 그가 당황해 뒷걸음질 치자 목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녀의 문을 연 주미는 그의 그림자가 됐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갈증 난 눈길에 앞장서 호텔 문을 밀었다. 잘못이 있다면 남자보다 먼저 호텔로 들어섰다는 죄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무슨 죄가 되는가. 오히려 그가 고마워해야 한다.

“넌 짜증스럽지 않아. 언제 봐도 상냥한 아이야.”

인숙 언니가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주미는 언니의 말에 위안이 됐다. 상냥한 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언니! 인섭 오빠가 왜 날 짜증스러운 여자라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그렇게 신경 쓰이니?”

“한 마디로 미치겠어.”

주미는 울상을 했다.

우리는 누가 보아도 부러울 만큼 다정다감했다. 연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티격태격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배려하는 마음이었고, 주미 역시 무엇을 무리하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누군가가 약속을 못 지키게 될 상황이 일어나도 서로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적어도 난 인섭 오빠에게 편안 여자였어요. 앙탈 한 번 부리지 않았으니까요.”

주미의 심각한 표정에 인숙 언니가 혀를 찼다.

“잊어버려. 별것도 아닌 일로 속 끓일 것 없어.”

“별것도 아니라고요? 언니는 내 심정을 몰라요.”

“알 것도 없잖니? 다시 말하는데 그만 신경 끊어.”

건성건성 말하는 듯한 인숙 언니의 행동에 주미는 약이 올랐다. 언니야 이 남자, 저 남자 겪을 만큼 겪었으니 초연할 수 있겠지만, 주미는 상황이 달랐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친 첫 남자가 바로 인섭 오빠였다.

“술 마시자.”

인숙 언니가 맥주와 땅콩을 가져오자 주미는 맥이 빠졌다. 술 마실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너 같은 여자 또 만날까 겁난다.

인섭 오빠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여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다 못해 뭉개 버린 후 사라졌다.

“어서 잔 비워라.”

인숙 언니의 재촉에 잔을 비우다 그에게 직접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나야. 이주미.”

주미는 굳이 이름을 댔다.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어. 날 짜증스러운 여자로 매도한 이유가 뭐야?”

주미는 숨도 안 쉬고 또박또박 물었다.

“꼭 알고 싶니?”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알고 싶어. 그것도 정확하게.”

“넌 섹스에 미친 여자야. 사랑은 포르노가 아닌데, 넌 그랬어.”

주미는 그의 말에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알았어. 고마워.”

주미는 전화를 끊으며 편두통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섹스의 욕구와 기교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짜증스러운 여자가 될 것이다.

“언니! 우리 취하자!”

주미는 두 개의 잔에 넘치도록 맥주를 따랐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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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