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결혼하자고 약속했잖아.”

“아! 그건 순전히 술 때문이었어.”

혜림은 수지의 심각한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두 손으로 긴 머리 단을 틀어 올렸다가 풀어헤쳤다. 커피를 더 가져왔다. 수지의 빈 컵에 반을 따랐다. 커피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혀끝으로 커피의 따뜻함을 맛보다 차갑게 말했다.

“짧은 인생, 언제 술자리 약속까지 책임지고 사니?”

수지는 기가 막혔다.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는 한 개비밖에 없었다. 혜림의 피우라는 손짓에 불을 붙였다. 창밖의 함박눈을 바라보던 혜림은 수지의 담배를 빼앗아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수지야! 너 사랑과 인생이 무엇인지 아니?”

“넌 센스 퀴즈?”

“아니. 현실.”

“문제가 너무 어렵다.”

“하긴 너 같은 맹순이가 알 리 없지.”

혜림은 검지로 컵의 물을 찍어 탁자에다 사랑과 인생이라고 썼다.

“사랑은 섹스, 인생은 돈. 이게 오늘의 가르침이다.”

“그럼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은?”

“새콤한 간식이지 뭐.”

혜림이가 혼외정사를 간식에다 비유하자 수지는 눈을 흘겼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깔깔거렸다.

“나 출판사 그만뒀어.”

혜림은 웃음을 멈추며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눈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다.

“새 직장 구했니?”

수지의 물음에 혜림은 고개를 저었다.

출판사는 전문대를 졸업한 후 어렵게 잡은 첫 직장이었다. 실업자 신세를 면했다는 기쁨에 코피 터지게 일했다. 서울과 지방의 서점으로 책을 발송할 때 힘겨운 포장 작업도 마다치 않았다. 작가와 편집팀들이 애써 만든 책이 팔리지 않고 반품되어 복도에까지 쌓일 때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일 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출판사의 일이 싫어졌다. 결근하는 날이 늘었다. 그 무렵 진석이를 만났다. 잡지사 기자인 그와는 아주 빠르게 뜨거워졌다. 모텔을 들락거리는 스물두 살의 매끄러운 몸은 성의 유희에 쉽게 빠졌다.

“어제의 혜림은 죽었어. 그만 나가자.”

혜림은 함박눈이 너무 좋았다. 순식간에 온몸을 하얗게 덮는 눈송이가 더없이 포근했다. 알몸으로 눈 속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수지는 눈을 싫어했다. 혜림이를 호프집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와 코트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물었다.

“어제의 혜림이가 죽었으면 오늘의 넌 뭐야?”

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fot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민 많이 했어. 내 앞날에 대해서.”

“그래서?”

“결심했어.”

“어떤 결심?”

“너, 지금 날 심문하니?”

혜림은 짐짓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수지를 노려봤다. 호프집은 조용했다. 두 팀이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들도 착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나, 성전환 수술할까 봐.”

혜림은 수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수지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혜림은 생글생글 웃었다.

“요년아! 미쳤다고 수술해? 이렇게 섹시한 몸매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새의 날갯짓을 하며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진석이와의 사랑은…….”

혜림은 팔랑거리던 몸짓을 접으며 자리에 앉았다. 생맥주를 마시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한 마디로 착각이었어.”

“무슨 소리야? 너희 둘은 늘 하나였잖니?”

“웃기지 마. 하나가 아니라 일방통행이었어.”

혜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울하거나 흥분할 때 일어나는 버릇이었다.

“사랑? 그건 섹스의 화려한 포장이야. 나도 처음엔 섹스를 진실한 사랑으로 믿었어.”

“연인의 섹스는 자연스러운 욕구잖아?”

“그게 바로 착각이야.”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수지는 비어 있는 두 잔에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넘쳤다. 잔 밑에 냅킨을 깔았다.

“진석이는 당연한 것처럼 몸을 요구했어.”

“그래서 헤어지겠다는 거니?”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야.”

혜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슴 앞쪽으로 흘러내렸다. 코팅 한 머리카락이 불빛에 더욱 윤이 났다.

“결혼 약속을 한 며칠 후였어. 모텔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었어. 그가 인터뷰 약속 때문에 나간 후 창문을 열었어.”

혜림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반쯤 남은 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창문을 열자 도로 건너편의 거대한 호텔이 날 짓눌렀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자꾸만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거센 파도로 덮쳐왔어. 낡은 모텔 방에 발가숭이로 서 있는 나. 너무도 초라했어.”

그날, 혜림은 월세방으로 돌아와서도 흐느꼈다고 했다. 울음을 참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적인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했다.

“지치도록 울다가 우연히 엿들은 얘기가 문득 기억났어.”

작은 커피숍에서 진석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자리의 두 여대생이 소근 거리며 킥킥거렸다.

“사랑? 개나 줘. 결혼은 무조건 돈 많은 놈과 해야 한다는 그녀들의 말. 난 그 의미를 절감했어.”

혜림은 수지의 멍한 표정에 눈웃음을 던졌다.

“당분간 널 만나지 못할 거야.”

혜림은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수지가 쿡 웃자 그녀의 생맥주 잔이 넘치도록 부딪쳤다. 숨이 차 더는 못 마실 때까지 생맥주를 빨아 당겼다. 차가운 생맥주를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재일교포 2세인 기현 오빠의 얼굴도 떠올랐다.

당장 오빠가 있는 동경으로 건너와.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