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자…, 우리의 영웅들을 위해, 건배!”

“화이팅!”

여향미가 건배를 제창한다.

눈치 하나만큼은 여왕벌 버금가는 여자다. 자신이 한 말에 부원들이 지나치게 예민하자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이.

그러자 모든 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잔을 치켜든다. 다들 적당히 취해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술자리는 늘 이런 식으로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퇴적된다.

그래서 젊은 여기자들은 웬만하면 회식 자리를 기피한다. 마지못해 참석했더라도 기회를 봐 수시로 탈출을 시도한다. 바로 오늘의 경우가 그렇다. 여향미란 불청객까지 끼어 은근히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것이 비위에 거슬린다. 더욱이 이한무의 비리가 밝혀질 듯하던 분위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깨지면서 그에 따른 실망감도 크다. 결국 여기자들은 눈치 채지 않도록 하나 둘 사라진다. 그녀들이 도망갈 때는 바람처럼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한무가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진다. 방금 전에 까발렸던 여향미의 말에 무척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실은 부원들이 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무래도 이런 식이라면 이한무는 내일 아침 또 출근이 늦을 것이다. 이한무의 폭주는 그 다음날 출근하는 데 지장을 준다. 그것은 그를 곤경에 빠뜨린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직장 상사라면 과음하고 늦게 출근하는 부하 직원을 좋게 볼 리 없다. 더구나 일 처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외적으로 무슨 좋은 실적을 올리는 것도 아닌 이상 찍힐 수밖에 없다. 그것도 몇 십 분 늦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시간에 출근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구본하나 함봉호도 무리했을 경우 가끔씩 늦는 경우도 있었다. 술 앞에서는 장사가 따로 없는 탓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늦게 출근할 경우 이한무는 오히려 더 노발대발한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다. 요컨대 이한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육하원칙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가장 중시하는 그 원칙을 무시하는 그가 신문사에 재직한다는 자체부터 지독한 아이러니다.

급기야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여향미가 갑자기 탁자에 얼굴을 파묻고 늘어진 것이다. 부원들이 있는 자리에 와서 폭탄주를 몇 순배 돌리더니 결국 탈이 나고 만 셈이다.

“얘, 향미야! 정신 차려.”

“것 봐! 내가 뭐랬어?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했더니만.”

여향미의 친구가 달려와 여향미를 부축인다.

하지만 여향미는 별 반응이 없다. 그녀를 흔들어 깨우자 이번에는 소파로 몸이 기우뚱한다.

“안 되겠네…. 누가, 택시 좀, 태우는 데까지 부축해 줄 사람 없나요?”

친구가 구본하를 바라보며 말한다.

마치 구본하에게 도움이라도 청하듯이.

하지만 우연의 일치이리라. 여향미의 친구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므로. 또한 여향미와의 관계를 그 친구가 당연히 알 턱이 없을 거였으므로.

“네, 그러지요.”

구본하는 여향미를 번쩍 들어 등에 업는다. 함봉호가 앞장서고 구본하는 그 뒤를 따른다. 여향미의 몸이 이상하게 가볍다. 그동안 야윈 것일까. 지난 봄 신두리 바닷가 밀월 여행 때 여향미를 업은 이후 두 달 만이다.

밤늦은 거리는 제멋대로 흔들리며 휘청거리고 있다. 이제 시내버스도 거의 다 끝나 가는 시간인 탓에 사람들이 제법 서두른다. 모범택시는 의외로 쉽게 잡혔다. 구본하는 가로수 뒤에 숨어 있고 함봉호가 대로변에 나가 부지런히 손을 놀린 탓이다. 구본하는 새삼스럽게 ‘일반적’인 것보다 ‘모범적’인 것을 취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까지 같이 가실래요? 그럼 좋겠는데….”

구본하가 택시에서 내리려고 하자 여향미의 친구가 잡는다.

“오늘 이대로 향미를 집에 보냈다가는 안되겠어요. 그래서 우리 집까지….”

친구가 애원하듯 목소리를 떤다.

“네, 그러죠.”

구본하는 선뜻 내키지 않아 간신히 대답한다.

“고마워요. 어느 부서에 있는 분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향미한테 보답하라고 할께요.”

친구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몰아쉰다.

여향미는 친구의 무릎에 엎드려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앞자리에 앉은 구본하는 불안한 나머지 연방 뒤를 돌아본다.

여향미의 친구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영화배우 뺨치는 수준이다. 수수하면서도 고전적인 여향미에 비해 친구는 서구적인 미모를 풍긴다. 여자란 자고로 첫눈에 섹시한 맛이 느껴져야 한다. 처음 보는 순간 다짜고짜 합방하고 싶을 만큼 욕심이 생기는 여자가 그렇다. 구본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에 딱 알맞은 스타일이다. 진한 화장 탓인지 나이도 그다지 들어 보이지 않는다.

구본하는 술김에 떠오르는 환상들이 못마땅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쓸데없는 망상이다. 착각하길 좋아하는 남자의 습성을 가장 원형적으로 타고난 놈이 바로 네가 아니던가. 꿈에서 어서 빨리 깨어나라.

택시는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다. 모범택시 운전수는 역시 모범적으로 아무 말이 없다.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택시 기사들만큼 피곤한 것도 없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짜증날 지경이다. 그들이 수다를 늘어놓는 이유는 거개가 잔돈을 되돌려주지 않으려는 연막전술이다. 그것이 아니면 오로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모범택시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므로 그만큼 부담이 오히려 적다.

모범택시는 그들을 신사동 로터리에 내려놓는다. 모범적인 운전수는 구본하를 대신해 여향미를 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위라도 하듯 최대한 굽실거리고 떠난다. 구본하는 다시 여향미를 업고 골목길로 들어선다.

앞장선 친구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새삼스럽다. 오랜만에 부딪치는 여향미의 굴곡진 몸들이 구본하를 꼬드기는데도 그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다. 어쩌면 앞에서 걸어가는 조각 작품같이 잘 빚어진 여자 탓인지도 모른다. 잘하면 루브르박물관의 비너스상 못잖은 여체를 감상할 수도….

강남권 도심은 알 듯 말 듯한 미로로 이루어져 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아도 의외로 복잡하다. 막상 들어서면 빠져나갈 통로조차 쉽게 가늠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미로는 눈에 익은 사람들로서는 별것 아니다. 그러나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이만저만 난감한 것이 아니다.

구본하는 여향미의 친구 집으로 들어서면서 잠깐 후회한다. 무작정 따라왔지만 나갈 길이 걱정된 탓이다. 물론 한참 동안 헤맨다거나, 혹은 행인에게 물어 보면 대로까지 나올 수야 있겠지만.

여향미를 업고 걷는 일이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따라오다 보니 골목길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다.

친구의 집은 독신녀가 사는 거소답게 깔끔하고 아늑하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향수 내음이 코를 부드럽게 감싼다. 통나무 목재로 편안한 분위기를 한껏 살린 거실이 돋보인다. 원룸식이지만 평형수가 제법 나가는 탓에 일급호텔 객실에 들어온 기분이다.

대개 혼자 사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엄연히 유별나게 마련이다. 우선 여자들은 집안의 정리정돈 형태가 다르다. 남자들은 대충 너절하게 늘어놓고 필요할 때만 임시방편으로 치운다. 하나 여자들은 무엇이든 깔끔하지 않으면 심사가 뒤틀린다.

구본하는 여향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인다. 환경이 바뀌어선지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그대로 잠에 빠진다. 그 사이에 여향미의 스커트가 무릎 위로 반쯤 올라가 흰 허벅지가 드러난다. 구본하는 익숙한 시녀처럼 치맛자락을 내려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구본하에게 다가온다.

“누구신지 참 고맙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네요?”

“아, 네. 저는 피아 편집부에 근무하는 구본하라고 합니다.”

“아무튼, 오늘 일 정말 고마웠어요.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아, 아닙니다. 직장 상사인데, 당연히….”

“저는…, 향미 고등학교 친구 김미화라고 해요.”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내일 여 부장님이 일찍 출근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세요. 전 그럼 이만….”

구본하는 그쯤에서 작별 인사를 한다.

“아,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가시면 되나요?”

김미화가 구본하의 손을 덥쑥 움켜잡는다.

“아니, 시간도 많이 늦고 해서, 이제 그만….”

“아, 아니에요. 이왕 늦은 것, 저랑 술 한 잔 더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여자 분들만 있는데…, 그만 가볼게요.”

“정말 순진하시다. 뭐 어때요? 그리고 집에 가 봤자 혼자밖에 없을 듯한데….”

“네!?”

구본하는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 줄 모른다.

꿈인지 생시인지 급작스럽게 혼선이 오고간다. 김미화에게 노총각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믿어지지 않는 노릇이다.

“아니, 제가 혼자 산다는 걸 어떻게…?”

구본하는 술이 화들짝 깨어나는 기분에 눈을 크게 뜬다.

“호호옷, 놀라긴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말했을 뿐인데.”

김미화가 고혹스럽게 웃는다.

김미화의 아미는 도에 넘치게 도발적이다. 잘 빚어진 입술이며 목덜미는 단 한방에 마비시킬 만큼 뇌쇄적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금방 술 준비할 테니까….”

김미화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주방 쪽으로 간다.

여향미는 여전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문득 처량한 생각이 든다. 예전과 달리 술을 제법 즐기는 여향미가 안쓰럽다. 무엇이 저 여자를 저토록 만들었는지. 지난 봄, 부적절한 관계 이후 외면했던 자신이 새삼스럽게 미안해진다.

잠시 후 김미화는 양주 세트를 준비해 온다. 양주는 뜻밖에도 ‘루이 13세’이다. 시중에서 300만원을 호가하는 그야말로 전문가들만 마시는 양주이다. 안주는 언제 준비했는지 호두, 은행, 문어, 멸치 등으로 제법 깔끔하다. 얼음에다 우유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전문가다운 솜씨이다.

뿐만 아니다. 그녀는 그새 프로페셔널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녀는 침대 옆의 옷장 앞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눈부신 여체 일부를 노출시킨다. 속살이 은은히 비치는 잠옷으로 바꿔 입는 과정이라서 어쩔 수 없다. 원룸의 장점이다. 구본하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전문가였다. 구본하 또한 프로답게 못 본 체 한다. 자신을 내보이길 좋아하는 프로의 아킬레스건은 무관심이 최고다.

“그나저나 우리 구 기자님은 어쩌다 아직도 솔로세요?”

“쿠쿳…, 바삐 살다 보니 혼기를 놓쳤습니다.”

“호옷! 그건 여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지, 남자들한테는 좀 어울리지 않네요.”

“그런가요? 후훗, 솔직히 제가 못난 탓이죠. 변명이 필요 없겠죠.”

“어머, 그렇다고 자신을 학대할 것까진…?”

그러는 사이 김미화는 양주잔을 연거푸 서너 잔이나 들이킨다.

작정하고 취하려는 사람 같다. 사내는 겁이 덜컥 난다. 마치 어느 미지의 별나라에 온 듯싶다. 여향미는 그 별나라의 여왕이고 김미화는 하녀이다. 하녀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이상한 별나라이다. 그야말로 신기루같은 별천지이다.

불현듯 여자의 뜨거운 숨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귓불이 간지럽다. 꿈이려니 믿고 싶다. 사내는 여자의 잠옷이 피부보다 더 부드러운 실크임을 처음으로 느낀다. 묘한 이치다. 별나라의 여자들이 입는 잠옷은 다 그런 모양이다. 여자의 역한 것이 가슴을 압박한다. 숨이 콱 막힐 것만 같다. 데모대는 진압시킬 수 없을 만큼 이미 난폭해져 있다. 고춧가루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물 대포라도 쏘아대야 할 판이다.

그때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을 법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제야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오늘밤, 날 가져.

사내를 구해 준 것은 귀에 익숙한 그 한마디다.

사내는 미친 듯이 미로를 따라 달린다.

걸음아, 날 살려라.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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