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구 기자는 가끔 너무 앞서가서 좀 어려워.”

“네!?”

“나는 그런 대로 구 기자를 잘 아니까 말을 쉽게 이해하지.”

“…….”

“아까 그 말은 우리가 아이들을 안 키워 봤기 때문에 당연히 폭죽놀이를 못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 아냐.”

“하핫, 눈치 챘군요.”

“그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

“……”

“구 기자는 그게 탈이야. 혹시 그래서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거 아니야!?”

“네?!”

“그렇게 말을 싹뚝 잘라먹고, 상대에게 괴로운 추리력을 요구하니 어떤 여자가 버티겠냐구.”

“하이고, 그 말은 이제 그만하세요. 부장님 말이 더 어렵습니다. 자, 마시고 우리도 폭죽놀이 가죠.”

두 사람은 그쯤에서 소주잔을 다시 비운다. 어느덧 세 병째 비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는 틈에 식당 안의 사람들이 물밀 듯이 빠져나가고 없다. 해가 지자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이미 바닷가에서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폭죽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폭죽은 식당 옆 구멍가게에서 판다. 구본하는 의외로 비싼 폭죽을 한 움큼 사들고 바닷가 모래톱으로 나왔다.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 여향미가 아이들처럼 폴짝폴짝 뛴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흰 연기를 뿌리며 까만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폭죽을 보고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구본하도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폭죽에다 불을 붙인다. 바닷가에 나온 사람들 모두가 다 함께 축제를 벌이는 듯이 함성을 지른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 쥐불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신나게 판을 벌이는 구본하에게 여향미가 다가와 팔짱을 낀다. 영화 속의 연인 같다. 그 숱한 영화들은 상투적으로 그렇게 바닷가를 배경으로 넣는다.

구본하는 더 이상 불꽃놀이를 할 수 없다. 폭죽도 다 떨어진 데다 여향미가 몸을 밀착해 왔기 때문이다. 팔 뒤꿈치에 와 닿는 여인의 체취가 과민하게 육감적이다. 여향미로부터 어느덧 중독성을 느낀다. 마치 오래 전부터 교감을 나누었던 여인의 몸처럼.

구본하는 허망한 웃음을 까만 허공에 쏘아댄다. 웃음은 폭죽처럼 하얀 연기를 흩뿌리며 사라진다. 그런데 놈은 아주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원망스런 눈길을 준다. 자신을 뱉은 더러운 입을 혐오하는 듯.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습한 눈물까지 흘리며.

구본하는 그제야 얼굴에 미세한 습기가 와 닿는 것을 알아챘다. 음습한 바닷바람 탓일까. 둔한 피부 감촉으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입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를 감지해낸 것은 다름 아닌 후각이다. 촉각이 못 하는 일을 후각이 해치운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묘한 기분이 된다. 마치 연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얼이 빠진 과학자라도 된 듯이.

“어, 안개비가 내리네!?”

그때 여향미가 아이처럼 소리친다.

“아닙니다. 이건 비가 아니라 바닷물이 섞인 바닷바람입니다.”

구본하는 그 틈에 여향미에게서 옥죄인 팔을 뺀다.

“호호홋…, 아니야.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마. 이건 가랑비라구!”

여향미가 자신만만하게 받아친다.

“…….”

구본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말라’는 말은 분명 여향미 혼자만의 특권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녀가 바다를 얘기하는데 무슨 사족이 필요한가.

하지만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명주실 같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양의 가느다란 실비였다. 더욱이 바닷가여서 물기가 섞여 실려 오는 바닷바람과 구분이 잘 안 되는 탓도 있었다.

“나는 파도의 물기를 담은 바닷바람인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비가 오니 좀 믿겨지지 않네요.”

“응, 원래 이쪽 서해 바닷가는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좀 전의 저녁노을은요?”

“아하, 자세히 못 보았군. 술 마시다 보니….”

“네!?”

“아까 본 노을은 비가 올 것을 미리 예견해 주었던 건데….”

“네? 나는 무슨 말인지….”

“응, 바다에서 오래 살다 보면 그걸 한눈에 알 수 있어. 아까는 보랏빛 노을 무리가 주변에 깔려 있었잖아. 물론 그 바람에 노을은 더 환상적이었지만….”

“……”

구본하는 속으로 탄성을 지른다. 어느 틈에 그렇게 자세히 관찰했던지 의아할 지경이다. 그저 술이나 마시는 줄 알았는데.

“어!? 이제는 비가 제법 굵어졌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자구.”

“네? 그냥 들어가요? 분위기 좋은데….”

“호호…, 그럴 수야 있나? 적당히 분위기 내라고 알맞게 비까지 내리는데.”

“그럼, 어떻게?”

“맥주 사다가 저기 비치파라솔에서 마시자구.”

“네, 좋지요.”

두 사람은 ‘바다여행 민박집’ 뜰에 마련된 비치파라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불꽃놀이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밤바다를 처음 만끽하는 듯한 아이들은 여전히 모래벌판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를 연방 터뜨렸다. 한참 동안 사진 찍는 일에 몰두하던 젊은 연인은 바다 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아주 안 보일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본하는 묘한 웃음을 흘린다. 문득 두 남녀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게망게한 생각이 스친 탓이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왜? 웃음이 계집애처럼 너무 예쁜데!?”

여향미가 맥주잔을 따르면서 눈을 흘긴다.

구본하의 이유 모를 웃음을 발견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웃음만큼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네에!?”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냐구?”

“아, 아니예요. 하하핫!”

“좀 전에 웃었잖아.”

“아, 예…. 저 바닷가로 사라진 아까 그 젊은 애들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머머…”

여향미가 간드러지게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는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문득 그 긴 머리가 파란 수은등 불빛과 부딪치는 순간 구본하의 눈이 반짝인다. 진작부터 꿈틀대던 욕정이 다시금 타협을 시작한 모양이다. 게다가 제법 마신 술이 적당하게 놈들과 거래하고 있다.

“그런데, 나…, 아까부터 구 기자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여향미가 다행히 싹수머리 없는 놈들을 한방에 박멸시킨다.

여향미는 웬만큼 취했으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게 뭔데요?”

“응. 그나저나 왜, 아직까지 운전면허증이 없지?”

“…….”

“말해 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아까 그 말 하려면 밤새도록 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하하핫! 무슨…, 밤새도록!? 물론 밤새도록 얘기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한마디로 아주 짧게 끝낼 수도 있지요.”

“그래서 더욱 궁금한데?”

“…차차, 말하려고 했는데요. 사실은 저 군에 가 있을 때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어요. 그때 충격이 너무 커, 훗날 운전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것이….”

“아, 그랬구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그때 충격이 너무 컸다면…. 그런데 무슨 밤새도록?”

“아, 그만큼 아버지와 얽힌 얘기를 다하려면 사연이 길다는 얘깁니다.”

“……”

여향미가 말없이 구본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무슨 노다지 금맥이라도 캐려는 광부처럼.

외등 탓일까. 그녀의 깊은 눈길이 오늘 따라 더욱 깊다. 자칫 빠질 듯한.

구본하는 서둘러 여향미의 시선으로부터 탈출한다. 웬만하면 그녀의 눈빛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오롯이 젖어드는 그녀의 눈은 너무나 집요한 요물이어서 자칫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으로 다짐한다. 진작부터 숨겨 왔던 속내평이다.

오늘 만큼은 실수하지 않으리라. 설사 마지못해 동행했지만 저번처럼 무참하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또 한 번 바보 같은 짓을 한다면 다시는 이 미로의 숲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안 돼!’

구본하는 하마터면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갑자기 술이 화들짝 깨어나는 듯했다. 역시 바닷가에서 마시는 술은 틀리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것도 공기가 안 좋은 데서 마시는 술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맑은 공기에다 시원한 바닷바람 탓에 여간해서 취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선에 가서는 한계에 이르겠지만.

구본하는 여향미로부터 외면한 눈을 애써 바다 쪽으로 돌린다. 마치 자살이라도 할 것처럼 용감하게 사라진 두 젊은 남녀를 찾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들이 보일 턱이 없다. 환한 대낮에도 끝이 안 보일 만큼 드넓은 해안선이다.

“구 기자, 놀면 뭐해. 자, 한잔!”

여향미가 치근덕거린다.

때맞추어 건배하는 것이 마치 구본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

“참, 그 친구는 여전히 속 썩이는 것 같던데.”

구본하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자 여향미가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누구 말이죠?”

“아, 그 좀 모자라는 친구 있잖아.”

“글쎄, 우리 신문사에 모자라는 친구가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죠.”

“호호홋…, 그런가? 그렇게도 모자라는 사람들이 많아?”

“제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윗사람부터 거의 다 수준 미달이….”

“에이, 그건 너무 했다.”

여향미는 구본하가 옆으로 삐딱하게 새자 혀를 끌끌 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함봉호 기자 말야. 그 친구 좀 문제 있다며?”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던데, 왜요?”

“동료 여기자들한테 미움을 엄청 받는다던데….”

“아닙니다. 그건 보는 사람 관점에 따라 다 틀려요. 여기자들은 당연히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왜 그래?”

“함 기자가 워낙 말이 없잖아요. 남자들한테도 말을 별로 안 하는데 여자들에게 오죽하겠어요?”

“글쎄, 구 기자가 그 친구를 그렇게 두둔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 제가 두둔하다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장님이 오히려 더 이상하시네요. 그 정도로 함 기자를 비방하실 필요가 없을 텐데.”

“…….”

여향미는 구본하가 던진 비수를 슬쩍 피하며 웃음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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