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서현 시인] 야자나무 숲속 길이 어지럽다, 말레이시아 랑카위의 어떤 골프장에서다. 캐디도 없다. 골프장 소개를 한 팸플릿을 보니 야자수와 잡목이 어우러져있는 사이로 페어웨이를 만든 야성의 골프장다.

미로 같은 페어웨이이지만 용케도 날아오는 볼은 없었다. 두어 홀을 지나고 나니 어디로 가야 다음(next) 코스로 가는 길인지 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외국인 골퍼 한 팀이 우리가 방금 지난 코스로 거꾸로 가려한다. 그들도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들이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분명 그 뒤나 옆으로 다음 홀로 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과연 풀숲에 next라고 쓴 팻말이 숨어있었다. 밀림이 눈에 익자 다음 홀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서울에서 좀처럼 갖기 어려운 아버지 S씨와 아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듯 p는 그들 뒤를 두어 발자국 떨어져 따라간다. S씨는 아들이 사업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업에 몰두하려면 절대적인 내조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밖의 일에 충실하다 보면 가정 일에 소홀하게 되고 술도 많이 먹어야 하므로 가정도 지키기 어렵고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에 건강도 해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돈은 사기를 당하고 잃어버릴 수 있어도 머릿속에 든 것은 아무도 못 빼앗아간다. 집을 사주느니 머릿속에 원하는 것 다 넣어주겠다’는 것이 S씨의 철학이었다. 오랜만에 필드를 함께 걸으며 아버지와 아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평소에는 엄마, 엄마 하였지만 언제고 막상 편먹는 것은 남자끼리이다.

굿샷! 롱홀이다. 한때 골프선수를 꿈꾸었던 아들이 투 온을 시켰다.

P는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자기 타수를 되짚어 본다. 드라이버 한 타, 우드 4번 한 번. 그리고 아이언 두 번? 피칭? 그린에서의 퍼팅은 여기서 저기로 쳤는데 홀을 지나쳤지? 고작해야 다섯 손가락 안팎의 숫자일 텐데도 도중에 우거진 야자 숲 속이 멋있었다는 생각일 뿐 모르겠다.

샷을 할 때 마다 그때그때의 정신이 묻어 나온다. 볼이 나가는 것을 보면 마음가짐을 속일 수 없다. 그래서 골퍼의 첫째 조건은 마음비우기다. 골프와 인생을 많이 비유한다. 삶에서도 마음비우기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 마음의 깊이가 얕아 더러는 감춰야 할 것도 못 감추고 즉각 반응을 한다.

볼은 두려워하거나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로 날아간다. 마음을 비우고 목표를 향하여 정확한 어드레스와 정성으로 볼을 보내는 순간부터는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그 이후는 신의 몫이다.

코스이동을 하는 도중 숲 모서리에 머리를 맞대고 소곤대고 있는 골퍼들을 보았다. 일본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앞 팀이 떠나기를 기다리며 방해가 되지 않게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아장아장 걷는 첫 손자 홍정이를 안고 며늘아기와 함께 여행 온 랑카위다. 결혼 전 두어 번 만나고 살림 난 며늘아가와 여행을 함께하는 것도 서로를 알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야자잎사귀로 얼기설기 지붕을 얹은 허름한 탁자 위에 맥주 한 캔을 놓고 앉아서 보는 해변이 황홀하다. 길게 벋은 해변을 며늘아기와 함께 걸었다.

어떻게 살아 왔을까! 핸디캡마저 모르는 우리는 필드의 동반자다. 서로 핸디를 주고받으면서 한 홀 한 홀 드라이버로 롱샷을 하고 세컨샷을 하고 아이언으로 거리를 겨냥하면서 그린에 올라 퍼터로 홀컵에 볼을 집어넣듯이 살아야겠다.

잔잔한 바다 물결이 소리 없이 밀려왔다가 잦아들곤 한다. 수평선에 걸려버린 듯한 저녁노을을 며늘아기와 함께 바라본다. 아가는 아까부터 모래놀이에 정신 팔려 엄마도 찾지 않는다.

땡그랑, 땡그랑, 홀컵으로 볼이 떨어지는 소리. 나이스 퍼팅!

골퍼들은 이 소리를 듣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다.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하여 파란그린위에 노란깃발을 홀컵 속에 꽂아 준다.

우리 인생은 18홀일까? 36홀일까?

박서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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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현 시인은...
문학시대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와 시와수상문학, 국제 펜 한국본부,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이다.
시집으로는 ‘바람은 혼자 울지 않는다’ ‘해바라기’ 등이 있다. 골프타임즈를 통해 매주 화요일 ‘박서현의 요지경 골프’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