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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사랑한 대통령] 막걸리 골프 박정희, ‘서울CC... 생애 첫 샷은 슬라이스’

“쉽지 않네. 서 있는 공을 맞히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안문석 작가l승인2015.12.26l수정2015.12.2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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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선생은 당시 이등병 한장상프로, 골프에 매료된 박정희는 참모들에게 골프를 권하며 “찾기 쉽게 일요일에는 골프장에 있으라”

[골프타임즈=안문석 작가] 박정희는 원래는 골프를 못했다. 군 장성이었지만 골프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군 장군들이 미군이나 미국대사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파티에도 가고 했지만 박정희는 그런 걸 싫어했다. 마지못해 파티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박정희는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다가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가 골프 못 치는 유일한 장군이고, 미국식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뉴스가 되기도 했다.

골프를 시작한 것은 5·16 쿠데타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난 1962년이었다. ‘외교를 위해서는 골프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시작했다. 그해 5월부터 한장상 프로한테서 배웠다. 1960~1970년대 최고의 프로골퍼로 활약했던 한장상은 1962년 당시에는 육군에 입대해 이등병을 달고 있었다.

박정희가 골프를 한다고 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 김종오가 수소문해 한장상을 찾아서 박정희한테 보냈다. 지시에 따라 머리도 어느 정도 기른 상태였다. 한장상은 먼저 목수들을 불러 장충동 국회의장 공관에 길이 15미터, 폭 10미터의 작은 연습장을 만들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국회의장 공관을 쓰고 있었다. 국회의장 공관은 장충체육관 맞은편에 있었다. 목재와 철재를 잔뜩 싣고 공관에 들어서자 경비병들이 그를 막아서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연습장을 설치하고 레슨을 시작했다.

박정희는 한장상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서 했다. “쉽지 않네. 서 있는 공을 맞히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하면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클럽은 스폴딩(Spalding)을 쓰고 있었다. 레슨을 세 번째 하는 도중에 갑자기 “외교사절을 만나야 한다”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한동안 골프를 못했다. 쿠데타 이후 민정 이양의 격랑이 심화되었고, 그해 12월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후 선거 정국에 들어가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46.6퍼센트 득표로 45.1퍼센트를 얻은 민정당의 윤보선을 간신히 이겼다.

대통령이 된 직후에도 골프를 한동안 못하다가 1964년 들어 클럽을 다시 잡았다. 청와대에서 조금씩 연습을 했다. 그해 가을 서울CC에서 머리를 올렸다. 경호실장 박종규와 함께 라운드를 했다. 첫 번째 홀 티박스에서 티샷을 했는데, 슬라이스가 나버렸다. 생애 첫 샷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두 번째 샷은 180야드(164미터) 정도 날아갔다. 샷을 하고는 골프채를 메고 갔다. 이런 습관은 이후 계속되었다.

군 시절 총을 메고 다니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장상이 첫 라운드에 동행하면서 레슨을 해줬다. 그립도 봐주고 자세도 잡아줬다. 그러다가 경호원한테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한장상은 너무 세게 치려하면 안 된다고 충고도 해줬다. 그러자 박정희는 “한 코치는 빨리 치면서 왜 나한테는 천천히 치라는 거요”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 당대 최고의 골퍼 한장상은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회원이며 삼성그룹 고(故) 이병철 회장의 골프 스승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골프를 늦게 배웠지만 아주 좋아했다. 기회가 되면 서울CC로 빠져나가 골프를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라운딩을 했다. 골프장을 걸으면서 “푸른 잔디를 걸으니까 좋구먼”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골프장도 많이 생겼다. 한양, 뉴코리아, 태릉, 안양컨트리클럽 등 20여 개의 골프장이 박정희 임기 동안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박정희가 자주 가는 골프장의 모든 직원은 신원 조회를 철저히 받아야 했다.

그런가 하면 관악CC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고 서울대학교를 그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의 시설이 낙후되어 이전했다는 말도 있고, 서울대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하도 해대니까 보기 싫어서 멀리 보냈다는 말도 있다. 서울대학교가 이전한 것이 1975년이고, 유신 반대 학생 시위가 10월 유신 1주년을 맞은 1973년 10월 시작되어 이후 계속되었음을 감안하면 후자가 맞는 말인 것 같다.

핸디캡은 18정도 되었다. 꼿꼿하게 서서 치는 스타일이었다. 거리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또박또박 쳤다. 자주 연습할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습을 할 때는 연습장보다는 라운딩을 하면서 레슨 받는 걸 좋아했다.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도 골프를 좋아했다. 잘하지는 못하고, 몸이 뚱뚱해 실제로 6홀 정도 하면 도중하차하는 일이 많았지만 골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입담이 좋았고, 서울CC에 나오는 유력 인사들의 골프 친목회인 ‘목동회’의 기술지도위원을 자칭했다. 사주가 없이 사단법인으로 운영된 서울CC의 2대 이사장도 지냈다.

하루는 박정희가 골프를 하는 데 장기영이 코스로 들어와 코치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장기영의 골프 실력을 아는 박정희는 핀잔을 줬다. “나중에 정식으로 시합이나 하지.” 그래도 장기영은 기죽지 않았다. 박정희와 라운드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도 역시 코치를 하려고 들었다. 박정희는 또 한마디 했다. “장기영은 입으로 명프로야.” 이후에도 장기영은 누구에게나 코치를 하려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9홀을 하는 때가 많았고, 끝나면 막걸리를 즐겼다. 때로는 라운딩 도중에도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기도 했다. 실제로 클럽하우스 식당의 직원이 막걸리통을 들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야말로 ‘막걸리 골프’였다. 서울CC에서 가까운 워커힐 호텔로 옮겨 술을 마시기도 했다.

1966년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왔을 때 머물던 스위트룸이 있었다. 그 방을 이용했다. 술은 청주, 안주는 소고기를 애용했다. 술이 거나해지면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는 18번 <황성옛터>를 3절까지 다 불렀다.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코스의 ‘19번 홀(The 19th Hole)’은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하고 그날의 골프를 이야기하며 즐기는 곳인데, 박정희의 19번 홀은 너무 거창했다.

골프장에 박정희가 자주 나오니까 캐디들도 편안하게 느꼈는지 자기들끼리 박정희를 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루는 캐디 둘이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골프 제일 잘 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야 한장상 프로겠지.”
“아니. 바로 저 앞에 계신 분.”
박정희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왜? 골프는 한장상 프로가 더 잘하지.”
“아냐. 아무리 잘하는 프로선수도 아너(honor, 이전 홀에서 이긴 사람이 티샷을 먼저 하는 것)를 못할 때도 있는데, 저분은 항상 아너를 하잖아.”

박정희가 한번 골프장 나들이를 하면 딸린 식구가 엄청 많았다. 경호원뿐만 아니라 비서진, 운전기사 등 모두 합치면 50명 정도 되었다. 서울CC처럼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던 골프장은 어디서 따로 돈이 들어올 데도 없어서 골프장 자체에서 이익을 내야 했다. 하지만 정부, 검찰, 법원, 군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회원 대우를 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많은 식구까지 데려와 식당을 이용했으니 골프장 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런 비용을 댄 사람이 김성곤이었다.

김성곤은 젊은 시절 사업으로 성공해 1962년에는 쌍용양회를 세웠고, 1963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면서 1965년부터는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정문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함께 정치 활동을 하던 주변의 국회의원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기도 했다. 김성곤은 박정희의 골프 비용도 대고 있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 노태우는 그들이 골프에 나서면서 발생하는 부대비용을 고스란히 골프장에 떠넘겼다.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에 김성곤 등이 찬성하는 ‘10·2 항명사건’(1971년)이 발생하기 전까지 박정희와 김성곤은 아주 긴밀했다. 김성곤은 1969년 삼선개헌에도 적극 나섰다. 둘은 골프장에서 꾸준히 우의를 다진 사이였다. 하지만 항명 사건 이후 서로 완전히 돌아섰다. 물론 골프를 같이하는 일도 없었다.

박정희는 1968년에 ‘골프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라’는 의미에서 대법관 전원에게 골프채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해에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었는데, 그의 대법원장 취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 민복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판사를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형을 내려 친일 인사로 비판받는 사람이다. 그도 1954년 서울CC가 복원되면서 골프를 시작해 마니아가 되었다.

삼성 회장 이병철, 법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사장을 하던 홍진기 등이 그의 골프 파트너였다. 박정희는 골프 좋아하는 민복기를 대법원장에 앉히면서 대법원 판사들도 모두 골프를 해보라고 골프채를 돌린 것이다.

주변 사람에게도 많이 권했다. “몸에 좋더라”, “술만 마시는 것보다 골프를 하는 게 좋다” 하면서 권장했다. 함께 쿠데타를 한 사람들에게 “찾기 쉽게 일요일에는 골프장에 있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 등이 골프를 자주 하게 되었다.

안문석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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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통령과 골프에서 발췌, / 저자 안문석 / 도서출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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